현동준 인천보훈지청장
 올해는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84주년이 되는 날이다. 요즘은 알수 없는 각종 기념일들도 많이 생겨나고 개인들마다 꼭 기억해야 하는 날들이 많이 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또 한민족이라면 잊지말고 기억해야 될 날중 하나가 이날이 아닐까 한다. 27년간의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이날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3.1 운동으로 자주독립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모아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킬 필요성이 대두될 당시 임시정부는 국내외적으로 여러개의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노령, 상해,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역량을 하나로 모아 일제에 투쟁해 나가야 하는 절실한 과제앞에서 민족지도자들은 임시정부 통합 작업에 착수하였고 결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출발한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제1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평등으로 한다(제3조)”라고 임시헌장에서 표명했듯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공화체제를 지향한 정부로 수립되었다.
 초기 임시정부는 이동녕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행정부와 의정원으로 구성되고 비밀행정조직인 연통제를 통해 국내와 실질적인 연관을 맺으면서 국내 정보수집과 독립자금 모집등의 활동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민주공화체제에 대한 운영미숙으로 국내지지기반이 형성되지 않았고, 1920년 말을 고비로 교통국과 연통부를 통한 국내 연락망이 일제 경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면서 국내로부터의 지원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였다. 특히 초기 임시정부가 기울였던 외교정책의 실패와 이에 따른 반임시정부세력의 형성등으로 임시정부는 심각한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설상가상으로 1931년 일제는 한국과 중국 두민족을 이간시키기 위해 만보산사태 및 만주사변, 상해사변을 일으켜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적대적 행동을 조성함으로 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에 김구 선생은 한일특무부대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이후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지를 이끌에 냄으로 임시정부는 침체기를 벗어나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되었다. 중일전쟁으로 8번씩이나 임시정부를 옮겨 다녀야 하는 수난속에서도 체계적인 군사계획과 훈련으로 일본에 대항할 전시체제를 준비하였고, 1940년 중경으로 임시정부를 옮긴후에는 한국독립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 최고기구에 걸맞는 체제를 확립하고 좌파세력까지 끌어안으면서 독립운동 중심세력으로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는등 외교독립국으로의 활동을 확고히 전개하였고 광복군을 창설하여 한반도 진입작전을 감행하는등 자주독립운동을 위해 단순히 열강의 승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참여로 독립을 앞당기기 위한 노력들을 심화시켜 나갔다.
 역사속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교차한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수립당시부터 일관되게 조국의 자주독립을 목표로 노선과 사상의 갈등속에서도 민주공화제의 전통을 지키면서 한민족의 정신적 구심체가 되어 향후 27년간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더구나 식민지역사상 우리 임시정부처럼 맥이 끊기지 않은 체 일체의 타협을 배격하며 완전독립을 추구한 사례는 세계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에서도 임시정부의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국가보다 개인의 행복을 우선시 한다는 통계가 얼마전 발표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개인의 행복을 소중히 여길수 있는 바탕에는 말없이 고통을 인내해온 우리 조상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가 조상들로부터 받은 그 희생의 마음을 우리도 후손에게 물려주도록 노력하는 것이 또한 이세대의 책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