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진 인천환경운동연합 부의장
 시대정신은 한 시대의 문화적 소산(所産)에 공통되는 인간의 정신적 태도나 양식, 또는 이념이다. 당대의 양식 있는 모든 정신적 행위는 이 시대정신을 잣대로 이루어진다. 어떠한 사회이든 시대정신이 살아 꿈틀대고 있어야 역동적인 사회 발전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모두가 함께 호흡하는 지금, 이곳의 시대정신은 무엇이며, 그것은 살아 꿈틀대고 있는가?
 시대정신에는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하늘이 내려준 정당한 삶을 얽매이고 있는 여러 사슬이나 불합리한 제도 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 가령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에는 중세의 신본주의(神本主義) 질서로부터 탈출하려는 사상이 담겨 있으며, ‘자유, 평등, 박애’로 상징되는 유럽의 시민혁명에는 반봉건적 압제에 대한 투쟁이 깃들어 있으며,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던 조선조 말의 시대정신은 반봉건-반외세 위정척사였다. 이처럼 기존의 질서가 대다수의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리고 있을 때, 시대정신은 그 시대에 맞는 옷을 입고 꽃피어난다.
 지금 온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라크 전쟁과 사스는 그 몸살을 웅변하고 있다. 인종과 종교, 이데올로기가 다름에 따른 대립과 전쟁은 많은 사람을 살상하고 있으며, 물질 만능주의와 인간 중심주의에 따른 개발은 지속적으로 지구 환경을 파괴하여 이제는 인간을 넘어 생명체 아니, 지구 자체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 지경이다. 지금 이 세상을 살기 좋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도 새로운 시대정신을 필요로 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얼마 전 방한하여 우리에게 감동을 준 틱냣한 스님으로부터 국내외의 종교계와 시민 사회단체를 비롯한 많은 지성들이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대정신에 입각한 활동이 이미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의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자라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중요한 현안마다 사회 여론이 짐짓 양분되는 현상이 드러난다. 보수와 개혁의 구도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가 그렇고, 3·1절 기념행사가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둘로 나뉘어 치러졌으며, 사려 깊지 못한 이들이 국론분열이라고까지 일컬은 최근의 파병 논의에서도 그렇다. 또한 친미-반미의 대립도 있으며, 한 교장의 자살을 가져온 학교 현장에서의 치열한 긴장도 결국 그러한 스펙트럼으로 이해해야 할 터이다.
 이러한 대립의 뒷면을 가만히 살펴보면 일관하여 흐르는 도도한 흐름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한 쪽은 기존 질서를 지키자는 쪽이고, 다른 한 쪽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기존 질서의 존립여부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조그만 변화에도 긴장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긴장은 단순히 이해관계로만 대립하지 않고 명분을 세우고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화한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정신이 바른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러할 때일수록, 곁가지와 지엽적인 것에 대한 미시적인 눈을 버릴 필요가 있다. 현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그것이 인류 보편성에 입각한 시대정신을 받치고 있는 것인지에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 성찰은 기존 질서가 우리에게 주는 안정감이나 경제적 이익을 훼손할 수도 있을 터이다.
 시대정신은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변화한다. 인류 공동체, 아니 생명 공동체의 밝음을 향해 하나의 과제가 충족되면 그 다음 과제를 행하여 걸음을 계속한다. 그 걸음의 과정에서 시대정신은 권력의 핵심부에 자리잡을 수도 있고, 변두리의 고통 속에 깃들기도 한다. 그것을 구현하려는 이들이 사회적 주류이든, 비주류이든 시대정신은 묵묵히 흘러 갈 뿐이다.
** 뉘: 시간과 공간을 합하여 일컫는 말, 우리 조상들은 시-공간을 분리하여 사고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