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봄'에 꽃을 피우자
 헐벗어 시렸던 가지 찾아 목련꽃망울 비집는 봄기운이 발 돋음 한다. 백 목련을 보노라 불연 듯 북녘 누님의 흰 얼굴이 떠오른다. 꽃말이 연모(戀慕)라던데 잠시의 헤어짐도 그립거늘 하물며 망자를 향한 애끓는 사모의 정에 있어서야. 4월 어스름 밤 정하한 꽃과 마주치면 까닭 모를 슬픔이 스미는 것은 이 시대에 한을 품고 사는 이의 그늘진 시각이 아닐까 싶다.
 시인 엘리어트는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 읊었거니와 참으로 나라 안팎에서 들려오는 극한적 대립은 정이 마른 황무지를 방불할 만큼 흉흉하다.
 굳이 4·3 사태나 4·19의거의 옛 상처를 들먹일 것도 없이 엊그제 같던 대구지하철 참사조차 세인의 기억에서 밀려나는 작금의 인심은 문자 그대로 잔인하다는 표현에 걸맞다. 하기야 이라크 전쟁이 일으키는 모래 폭풍이 국론을 들쑤시고 대륙황사마저 괴질을 몰고 오는 판에 인심의 야박함을 따지기엔 경황없다 하겠다 만은.
 그러나 역사는 잊어서는 아니 될 사안에 대한 소중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니 여기 흰 꽃에 얽힌 학생운동 사례도 그 하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뮌헨은 ‘나치스 운동의 수도’라 할만큼 히틀러의 위세가 등등했고 이에 맞서 뮌헨대학을 축으로 한 반 나치스 저항도 꾸준히 세를 불려 나갔다.
 이런 와중에서 1943년 학생그룹(백장미) 핵심멤버 세 사람이 나치로부터 반역자로 낙인 찍혀 처형당하자 그들이 호소문이 이심전심 메아리쳐 큰 반응을 일으켜 나갔다. “마음에 걸친 ‘무관심’이라는 이름의 거추장스러운 옷을 찢어 버려라! 뒤늦기 전에 결단하라”고. 이 외침이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은 바로 ‘무관심’에 대한 질타다. 삶을 옥죄는 일과 마주칠 때마다 자기와의 이해관계가 덜하면 외면하는 것이 처세인 양 치부하는 무관심은 누어 침 뱉기의 인과업보가 돌아온다는 지적이다. 날이면 날마다 각종 대형사고가 꼬리 무는 이면에는 매사 내 일로서 자각하고 규명하며 시정하려는 공인의식의 불감증에서 비롯한다.
 이점을 감안할 때 인도적 측면과 국가이해가 겹친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조성된 비상한 명제를 나와는 상관없는 강 건너 불 구경으로 여기는 행세는 무관심의 극치다. 무릇 젊은이가 노하지 않는 나라는 끝장이라는 관점에서 볼진댄 연일 요원의 불길처럼 일고 있는 반전운동은 양식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서 마음 든든하다.
 다만 관련사항에 토를 붙이자면 미국의 독선을 규탄하는 한편으로 차제에 북한으로 하여금 ‘독불장군은 없다’는 우정어린 충언도 나섰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따라서 한반도 주변에 형성 된 현실적 국제역학관계를 감안하면 명분에 앞서 보다 다양한 국익측면에서 접근한 이번 국회파병 동의는 고뇌 어린 결정으로 승복해야 한다. 여기에 냉정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중화시킬 대화와 이해가 선행 돼야 한다는 것이니 바로 나의 주장이 정당한 만큼이나 남의 의견을 소중히 다룰 줄 아는 아량이다.
 새삼 돌이켜 보면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밟는 느낌이며 따라서 무심 그 차체가 잔인하다는 역설이 나옴직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4월은 옛 시인의 말 그대로 잔인한 달일까? 헤아려 보건대 그의 내면에 깔린 ‘잔인’이란 다름 아닌 한 알 씨앗이 싹 트는데도 열과 껍질을 벗기는(脫殼) 아픔을 참아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거부감은 덜 할 것이다.
 겨울이 오면 봄은 머지 않다는 만고의 진리처럼 어찌 하늘이 내린 화창한 계절에 ‘잔인한 봄’만을 되뇔 수 있을 것인가. 이 달이 무르익으면 부활절도 열릴 것이니 저마다 거듭나는 자기쇄신의 기회로 삼아 이 화창한 봄날에 화합의 기운을 가꾸기 거듭 당부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