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인천의 옛 사진을 정리하다 보면 학생들의 단체사진에서 그시절 학생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때는 학생복이라고 해야 우리 한복 차림이었다. 당시의 학교로는 사학의 남녀 영화학교와 우리나라 관학의 시초인 인천외국어학교인데 한결같이 검정 두루마기에 갓차림이다가 얼마후 교모가 나타난다. 1907년 집총군사교육을 받는 영화학교의 모습이 그렇고 외국어학교의 졸업기념 사진이 그러하다.

 우리나라 남학생의 서양복식은 1915년경부터였으며 여학생의 경우도 치마 저고리였다가 1930년대 일제의 강요로 세일러 상의에 주름치마가 대신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도 비교적 학생복이 오래였던 셈이다. 일본 중국과 같은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고유의 한복이냐 양복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인 것을 교복이라면 무작정 일제의 찌꺼기라고 치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지난 82년초 교복자유화가 있었을 때도 내세운 구실은 자율시대를 맞아 지난날의 잔재를 과감히 벗어 던진다는 것이었다. 사실 획일성을 강요하는 복장의 단일화가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성과 자유를 속박한다. 나폴레옹도 일찍이 『사람은 그 제복대로의 인간이 된다』고 했었다. 지난날 졸업식장에서 교복을 벗어 찢고 밀가루 범벅이 되던 해프닝도 실은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급하게 교복을 폐지하다 보니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했다. 정확한 분석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교복을 벗자 학생탈선이 늘고 패션화로 학부모의 부담이 크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3년뒤 교복착용 보완조치가 내려지고 다시 교복을 착용하기에 이르렀다. 91년에는 전국의 학교 74%가 교복으로 환원했으며 당시의 인천은 78%였다. 지금은 교복 아닌 학교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신학기를 앞둔 요즘 교복으로 인한 아름다운 정경이 여기저기서 피어나고 있다. 교복 물려주기나 바자회가 그것이다. 교복 물려주기는 모교의 전통과 선배의 체취를 느끼며 불우학우를 돕는 일석삼조의 효과가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