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스님이 자는 방에 강도가 들어왔다. 눈 아래로 복면을 하고 시퍼렇게 날이 선 식칼을 든 강도는 방안을 살펴보았지만 도대체 가져갈 물건이 없었다. 낭패였다. 하지만 굶주린 처자식을 생각하고는 마음을 독하게 다지면서 스님을 발길로 툭툭 차서 깨웠다. 엉겁결에 일어나 눈을 비비는 스님 턱밑에 칼날이 달빛에 번쩍였다.

 『무슨 일이오?』

 『쌀을 내시오!』하고 강도가 대답하였을때 스님의 고함이 터졌다.

 『이놈아! 쌀을 가져가려면 자루를 갖고와야지, 왜 칼을 가져왔느냐?』

 스님의 호통에 강도는 문득 느낀 바가 있어 칼을 버리고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칼이란 무엇인가? 「나」밖에 모르는 이기심이 바로 칼이다. 자기 이익만을 찾는 마음은 남을 찔러대기 마련이다. 이런 칼을 지니고서는 부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다. 쌀 한톨 올려놓을 수 없는 칼끝을 버리고 넉넉한 자루를 내밀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하시어 한 중생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복을 달라고 빌고 빈다. 하지만 부처님의 자비를 받는 사람도 있고 못받는 사람도 있음은 어찌된 일인가? 쌀을 얻으려면 자루를 내밀어야 하는데 칼을 들고 갔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자비를 받으려면 그분의 마음과 주파수(파장)를 맞추어야 한다. TV 채널을 인천방송에 맞추어야 그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데 내 마음이 자비로 충만할수록 부처님의 복을 나도 누릴 수가 있다.

 「요즘같은 경제난국 시대에, 뭐 가진게 있어야 자비를 실천할 수 있지 않은가?」 할 사람이 있겠지만 재산이 없어도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이 「아함경」에 있다. 「무재칠시(無財七施)」로서 「부드러운 눈으로 사람을 대함,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대함, 좋은 말로 대함, 예의 바르게 대함, 선심(善心)을 가지고 대함, 자리를 양보함, 숙식을 제공함」등이다.

 실로 누구든지 실천할 수 있는 것인데 이 실천으로써 복을 받을 수 있으니 자비행은 부처님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다. 우리 한번 스스로를 돌이켜 보자. 칼같은 사람인가, 자루같은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