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열며
김규원(편집국장)

 중국 오지에 가면 신객(信客)이 있었다. 우편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우편배달부 노릇을 하는 독특한 직업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양반집에선 머슴이나 몸종들이 서찰이나 귀중품을 전달하는 배달부 노릇을 해 왔다. 여의치 않은 서민들은 해당 지역의 장터에 가서 해당 지역 동네 사람을 만나 내용을 전달했다. 촌각을 다투는 화급한 상황에선 직접 다리품을 파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부고(訃告)를 알리는 것도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친척들이 나서기 때문에 직업이라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신객은 자영업의 형태로 자리잡아 왔다. 한 지역에서 외지로 나가 생활하는 사람들이 집으로 안부나 물품을 전달할 때 찾는 직업이다. 의뢰인이 부탁하는 물건이나 정보들이 다양해서 신객의 조건이 까다로웠다. 분명 많은 돈을 버는 선망의 직업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닐 튼튼한 몸과 출중한 무술실력을 갖추어야 했다. 언제 어떤 주문을 받고 다녀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상당 지역의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어야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었다.
돈 몇 푼 받지 않고도 강 건너, 바다 넘어, 산을 지나 목적지에 도달하는 고달픈 여정을 거뜬히 소화해야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편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긍심이 선결되어야 했다. 자의든, 타의든간에 신객의 길에 들어설 때만 해도 자긍심을 가졌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직업을 통해 몸에 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런 조건 때문에 신객들은 한동안 중국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비록 사회적 지위가 낮은데다 생활형편이 어려워도 인정받는 직업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신교육 제도가 도입되면서 지리과목을 맡는 선생님으로 직업을 옮긴 신객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수십년간 여러 곳을 다니면서 무수히 많은 서신을 대필하다보니 학력수준도 만만찮았다. 더군다나 지리에 밝아 학생들에게 생생한 교육을 전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조건을 갖춘 신객들도 늙어 힘 못 쓸 때까지 정년퇴직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신객들이 중도에 그만둔 것은 일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신객의 자격을 잃어서였다.
말 그대로 신객(信客)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귀한 물건에서부터 어음이나 현금에 이르기까지 귀중품을 전달하는 직업은 무엇보다도 신뢰가 생명이다. 이를 지키지 못한 신객들은 그 직업에서 영원히 도태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중국에서도 이제 신객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그러나 급격히 개방사회로 접어들면서 신뢰가 무너지자 신객정신을 되살리자는 목소리가 언론을 통해 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신뢰성 회복운동이 강하게 일고 있다. 각 분야에서 보여주는 갈등구조의 대부분이 불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여야가 대선 직후부터 곤혹을 치르고 있는 정치개혁도, 노동자와 사용자가 불협화음을 겪는 노사문제도, 교단에서 무너지는 사제관계도, 쉽게 흔들리는 가정문제 등 모든 분야의 갈등과 대립은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에서부터 조성되는 것이다.
언론계에서도 불신의 폐해가 잇따르고 있다. 신문보단 인터넷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정보를 취득하려는 추세가 강하게 일고 있다. 뭔가 틀에 박힌 제도권 언론보단 넘나들기가 자유롭고,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인터넷이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늘고 있다. 지방자치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지방지를 보지 않더라도 중앙지만으로도 지역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지역 주민들이 상당수다.
이 모든 문제도 불신이 가져온 결과로 본다. 그동안 제도권 언론이 보여준 편파보도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오히려 인터넷 공간에서 정확한 정보를 얻고, 공정한 토론을 통해 올바른 관념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진다.
지방언론도 그렇다. 거대 중앙언론들의 무차별적인 시장공세만 한탄했지, 주민들의 입맛에 맞는 신문이 아니었기에 외면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역 주민이 신뢰하지 않는 지방언론은 더 이상 설 땅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제는 신뢰쌓기다. 정치권도, 노사관계도, 사제관계도, 가정문제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관계정립이 필요하다. 지방언론도 중앙 탓만 해오던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주민들과 함께 만드는 열린 언론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지역에서 인정받는 언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화려하지도, 넉넉하지도 않지만 성공한 신객처럼 신뢰를 쌓아가겠다는 각오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