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불길한 일, 재수없는 일등 스스로 어쩔수 없이 운명이라고 치부해온 체념속에 징크스(jinx)는 싹튼다. 이 말이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것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에게 심리적 부담을 안겨왔지만 수(數)와 관련된 금기(禁忌) 또한 예외가 아니다.

 아다시피 우리와 일본은 4자 발음이 각기 「死」와 같다하여 기피하거니와 기독교 영향권에서는 13을 몹시 꺼린다.

 그 이유인즉 예수를 팔아 넘긴 가롯유다의 이름이 13자(Judus Iscariot)인데 근거한다는 이야기다. 어찌보면 황당해 보이지만 자고로 미 해군성에서 13일 금요일 새로 건조한 함정을 진수시킨적이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징크스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이와 관련해 최근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구랍 금강산 관광당시 부여받은 북한입국사증 번호가 13번인데다 13회째의 선편 배정은 물론 휴전선을 넘어 북한수역에 진입한 날이 바로 13일이어서 솔직히 기분이 편치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아무 뒤탈없이 돌아와 지금 이 글을 적고있어 새삼 징크스는 깨야한는 확신이 선다. 그도 그럴 것이 1999년을 맞으면서 이번에는 9자에 얽힌 「종말론」으로 시끌시끌한 상황이니 말이다. 일본은 9자 발음이 「苦」와 같다하여 경원해왔고 우리 민속 또한 남자 나이에 아홉수가 드는 해를 꺼리는 추세라 이후 사이비종교 따위의 행적이 경계되는 까닭이다.

 특히 1999년을 「세기의 종말」로 지목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구체적으로 1999년 8월18일(陰 7월)로 못박고 있어 몽매한 일부 민심의 동요가 염려된다.

 지난 11일 치러진 서울대 면접에서 「과학 발전에도 초자연적 형상을 믿는 것은 시대를 반영한 사회의 특성인가, 개인의 특성인가」를 묻고 있어 새삼 오늘의 세태를 민감하게 읽고 있다는 지적이다.

 방금 PC통신, 인터넷등에서 속속 종말론 코너가 등장하고 있다 하거니와 우리가 바라는 바는 이 묵과할 수 없는 징조(징크스)를 깰 예지와 의지가 기대된다는 것이다.

 그간 종말론에 관련된 사례는 부지기수였으며 서기 999년에도 비슷한 예언이 유럽을 휩쓸었지만 천년이 지난 오늘날 여전히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실증을 통해 부질없는 해프닝임을 차제에 봉쇄하자 함이다.

 하루가 저물면 새 아침이 예비되듯이 1999년은 20세기라는 한세기의 「종말」이자 영광된 21세기의 시작을 뜻하는 전진적 과정일 망정 후퇴는 아니다.

 굳이 종말론」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주어진 과제에 최선을 다하자는 일깨움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지금 IMF사태라는 이름의 「경제적 종말론」의 경고를 받은 형세에 있으며 따라서 이 난국을 수습할 전력투구만이 이 파국을 극복할 최선의 길이다.

 이제 심각한 사안을 제쳐놓고 한토막 우화(寓話)에서 여유를 찾고자함 또한 이 때문이다.

 어느날 어느곳에선가 어쩌다 개구리 세마리가 우유병에 빠졌더란다. 그중 비관주의적 개구리는 살아보려고 궁리해봤자 별 도리 없을 것이라고 단념한 끝에 그대로 빠져 죽었다.

 두번째 낙관주의 개구리는 아무런 대책을 쓰지 않더라도 잘 될 것이라 안이하게 생각하다 이 역시 그대로 빠져 죽고만다.

 하지만 세번째 현실적 개구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팔다리를 움직이는 일밖에 달리 방편이 없다고 생각한 끝에 죽을 힘을 다하자 그동안 우유가 버터로 응고되어 디디고 살아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또한 지금 우유병 속에 빠진 개구리와 같은 처지에 있다. 세기의 종말론이 날로 기세를 돋우는 이 풍진 세상에서 어느 개구리가 주는 교훈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는 설명의 여지가 없다.

 일러서 한국형 종말론은 이미 지난 97년 외환위기로 몰아왔건만 정작 정부의 안이한 대처는 낙관적 개구리의 처세를 방불케했다는 지적을 모면키 어렵다. 따라서 뒤늦게나마 당면한 대응책은 실패를 거울 삼은 냉철한 현실감각이다.

 역사적으로 생명의 소멸과 탄생이 거듭되는 한편으로 우주의 존재는 확고한 만고부동의 진리라는 신념을 일깨워 잡다한 징크스를 깨부숴야 할 계기로 삼자함이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