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100년

김 규 원(편집국장)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2년. 지독하게 추웠던 12월22일 제물포항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하와이로 떠나는 102명의 한인들이 초조한 모습으로 배에 올랐다. ‘켄카이호’ 3등칸에 자리한 이민자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꿈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갤릭호’로 배를 갈아탄 이들은 다음해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해 아메리칸 드림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스타불리틴’과 ‘하와이언 스타’ 등 현지 언론들은 ‘은둔왕국의 102명 백성이 농장 노동자로 행운을 찾아 이곳을 찾았다’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해결책이 오늘 아침 도착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언론들은 21명의 여성과 어린이 25명 등을 제외한 건장한 남성들인 이민단이 하와이에 온 것은 실험적인 성격을 띤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들 이민자들은 참혹한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이민 온 것이 아니냐는 추측보도도 곁들였다.
어떤 상황이 이들을 이역만리로 내몰았던가. 1901년에 전국적인 가뭄이 계속돼 울진에서 26명이 굶어 죽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이듬해엔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창궐해 매일 300~400명의 사체가 쌓였다. 사회적으론 동포를 해외에 보내 신문물을 들여오자는 ‘서구문명 도입운동’이 불어닥쳤다. 여기에 일본인들의 한국진출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일자리를 내준 내국인들의 생활고를 가중시켰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은둔왕국 백성들에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이 꿈이었다. 현지 언론의 보도대로 초기엔 먹고 살기 위한 이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신분은 다양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시 중단될 때까지 7천2백여명의 이민자들의 직업을 보면 전직관료에서부터 부랑아에 이르렀다. 그 후 1912년부턴 인천, 수원, 서울 등지에서 사진으로 맞선 본 예비신랑을 찾아 하와이를 찾는 신부들이 물결을 이뤘다. 다음으로 1947년부터 미군과 결혼하여 이주하는 평화부인과 유학생, 전쟁고아 등의 이주로 이어진 데 이어 1968년부터 자유이민의 역사를 걸어왔다.
초기 이민자들은 노예노동을 감수했다. 하루 10시간씩 일하고 받은 임금은 70센트. 월급이 15달러였다.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농장주인이 대납한 배삯 50달러를 월급에서 1달러씩 갚았다.
고향 떠나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머나먼 고국땅을 그리면서 월급에서 20센트씩 갹출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채권을 매입하기 위해서였다.1920년대까지 2백만달러를 모아 독립자금을 댔다. 한인들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것이 모자라 빅아일랜드에서 숯가마를 운영하면서 자금을 모아 중국 임시정부로 송금했다.
이민 초기에 쌓아온 나라사랑 운동은 대를 이어 옮겨졌다. 해방된 뒤에는 조국의 재건운동에, 한국전쟁 뒤에는 성금운동을 적극 펼쳤다. 군사독재 시절엔 조국 민주주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탈냉전을 통한 통일운동에도 앞장서왔다. 그런가 하면 조국이 경제위기에 빠졌을 때 펼친 ‘금모으기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 월드컵 기간 중엔 밤잠을 설치고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민족의 동질성을 재확인하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4대에 내려오면서 2백만명에 달하는 재미 한인동포들은 이제 미국사회를 움직이는 한축으로 성장했다. 사탕수수밭에서 노예노동으로 시작한 한인들은 고위관료, 판사, 변호사, 교수, 의사, 엔지니어, 교사, 언론인, 기업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를 꾸준히 배출해내는 자랑스런 민족으로 성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내년엔 다양한 100주년 기념행사를 펼진다. 하와이뿐만 아니라 뉴욕, 로스앤젤레스, 워싱턴 등지에서 학술대회와 미술전시회, 공연 등이 마련됐다. 최초 이민자들의 출발지인 인천에선 미술협회 주관으로 호놀룰루에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올해로 114회를 맞는 LA 로즈퍼레이드에 우리의 대형 꽃차가 선뵈는 가슴 벅찬 행사도 차질없이 진행중이다.
 상·하원의 결의에 이어 내년 초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공식 발표할 ‘2003년 한국이민의 해’를 계기로 미국내 한인들의 위상이 한껏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민 50주년인 1952년엔 한인들의 성금으로 인하(인천∼하와이)공대 설립이 추진됐다. 이제 한세기로 접어들었다. 100년의 이민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해온 인천에서도 기념사업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