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慶龍 칼럼>
교육 외길, 인생 한길

 柳忠烈 선생의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열린 지도 벌써 일주일. 새삼 떠올리는 까닭은 제호(‘교육 외길, 그 반생을 돌아보며’)가 시사하는 ‘길’의 함축성 때문이다.
“길을 알면 앞서 가라”하였거니와 柳선생은 한 시대의 획을 그은 길잡이라 하여 모자람 없는 입지적 경륜을 쌓은 분이다.
그의 인생행로를 교직에 전력투구 중인 반생과 경찰에 헌신했던 전반부로 나누어도 가르쳐 일깨움의 작업은 양자를 잇는 외길목에서 교감한다.
생각하기 따라서는 민중의 공복에서 이세(二世)교육의 현장에 나선 과정이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억지 연결이라 할지 모른다.
허나 1955년 인천경찰서장으로 부임해 애써 씨뿌린 소년직업학교가 뒷날 학교법인 光星學園으로 성장해 갈무리하고 있음을 상기하면 그의 교육이념은 초지일관 변함없는 한 길이다.
외곬 인생은 영욕의 과정을 두루 새기고 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장엄한 낙조를 대하는 것처럼 깊이가 있다. 걸어오고 가다 보면 본의 아니게 남의 눈총받는 시련도 겪었을 터인데도 세월의 ‘때’가 낀 노추(老醜)가 보이지 않아 좋다.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君子三樂) 가운데 하나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일이라 하였다지만 오늘의 사도(師道)가 예전 같지 않은 힘겨운 상황을 거쳐옴에 있어서야.
당일 참석하고 나서의 감흥은 초청대상이 저명인사라 하기보다 더불어 고락을 나누어온 길손만으로 성황을 이루었던 것이 그가 외롭지 않음을 입증한 보기다.
柳선생은 金堤人. 출생지에 공들여 설립한 碧城대학이 그곳에 엄연하건만 고향이란 정과 열을 처음 쏟은 곳이라 하여 굳이 이 고장에서 모임을 가진 자체가 인천사랑의 표출이다.
이처럼 지역성에 구애받지 않는 ‘富國富民’의 생활신조는 오로지 나라사랑으로 귀결되기에 그의 국가관은 투철할 수밖에 없다.
무릇 사람이란 누구나 태어나 어떤 형태이건 나라와 고장과 겨레로부터 도움받았으므로 묵은 빚 갚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이 그의 교육관에 반영되고 있는 연유다.
이처럼 나라사랑의 보기는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출판기념회 단상에 태극기를 등단시킨 것만으로도 그의 주체정신을 가늠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부산 아시아 경기대회에서조차 푸대접받았던 그 태극기를 말이다.
또 하나 생각나는 에피소드는 그의 평생교육적 자세. 어언 미수(米壽) 고령이건만 깨달아야 산다는 학구에 지침이 없어 일상에 책을 멀리한 적이 없다니 타산지석으로 삼아봄직 하지 않는가.
柳忠烈 선생의 아호는 秋圃. 어의대로라면 “가을 채마 밭”은 한 여름 넓은 무논이 아니라 집에서 한 해 가꾼 남새 밭 정도니 까닭에 이를 넉넉한 아량에 비유한다면 문외한의 독단이라 할 것인가?
광성학원이 평소 교훈을 통해 외양보다 ‘성실’을 으뜸 생활관으로 강조해온 사실 또한 이로 미루어 보면 우연이 아니다. 지식만이 교육의 전부가 아니라 사람의 성정을 올바르게 키우는 덕육이 바로 서야 진정한 전인교육이 아니겠는가 함이다.
이처럼 겸양을 지닌 소박한 인품에 비해 그의 ‘일 욕심’은 남달라 오늘도 “배움에 목마른 학생을 위해 나는 또 무슨 가르침을 준비”할 것인가를 쉴 새 없이 반문하는 현재 진행형이다.
모름지기 생애를 통해 뜻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보람은 그의 건강을 지탱하는 원천이라 할 것이다. 柳忠烈 선생의 ‘교육 외길’은 노년인생에 시사하는 덕목이기에 이어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