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뉴스에 경기도 양주 파평윤씨 선산에서 묘(墓) 이장중 436년된 미녀 미라가 발견되었다. 이 미라는 중종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친정 4촌 오빠인 윤원임의 손녀딸로 155㎝의 키에 잠자는 듯 너무도 예쁜 미녀형이었다고 한다. 피부와 장기는 물론 6개월쯤된 태아까지 나와 임신중 사망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얼마전에는 파주군 파평윤씨 선산에서 5세 남자아이의 생생한 미라가 발견되었다. 봉분을 파헤치자 2m 지하에서 두꺼운 백회 콘크리트층이 나오고, 너무 견고하여 석공이 2시간 동안 징으로 쫘서 파쇄한 결과 백석회층의 두께가 무려 30㎝나 되었으며 그속에서 또 다른 목관이 나오는데 무색임(장시간 물에 담가둠)된 소나무결이 어찌나 선명한 지 350년된 나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이 외관을 뜯어내니 미라가 잠자고 있는 내관이 나왔다. 10㎝가 넘는 두꺼운 목관 안에는 마치 살아서 잠을 자는 듯 다섯살짜리 소년이 누워 있었다. 윤씨가문의 처음 본 한 목격자는 “관 뚜껑을 여니 공기가 들어가면서 선명했던 얼굴과 살결이 말라붙어 굳어지기는 했으나 이렇게 시신이 그대로 있는 미라는 처음”이라며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필자는 35년전인 1967년도에 용현동 철길 위 광산김씨 14대조 묘 이장하는데서 위와 똑같은 두꺼운 돌외관과 목관에서 400년된 참판의 미라를 목격했었다. 많은 책과 유품이 그대로 있었으며 청실홍실 명정도 그대로 색상조차 변하지 않고 선명했었다.
 필자가 고고학을 탐닉했었기에 72년도에 백제 25대왕인 공주 무령왕릉 발굴현장과 73년의 경주 황남대총 발굴현장이며 많은 무덤 발굴현장은 거의 달려가 철저하게 목격했었다. 경주 98호 천마총에서는 왕의 금관과 요대 등 많은 유품이 나왔고 특이할 만한 것은 왕의 치아가 1천∼500년 동안 썩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는 점과 일부 대퇴부 등 굵은 뼈도 발굴되었었다.
 그리고 74년도의 인천 서창동 김해김씨 10대조 묘 이장에서도 40대 중반의 미녀 미라가 정맥혈흔이 선명하고 피부색이 생시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마치 시신이 잠자는 듯 누워있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 1976년에는 역시 인천 검암동 야산의 300년된 묘에서 반미라가 탈골만 된 채 발굴되었었다. 이 모두 견고하고 깊고 두꺼운 돌관과 두겹의 목관 속이었기에 공기도 전혀 통하지 않고 온도도 매장될 때의 그대로이며, 습도와 건기도 변하지 않고 균일하였기에 상하거나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수백년을 유지시켜온 것이리라.
 10∼20년만 되면 탈골되는 요즘 매장문화와는 판이한 것이다.
 다시 본론인 미라로 돌아가보자. 위의 이 소년의 미라를 DNA 검사와 탄소측정으로 정밀 검색해본 결과 350년 전후로 분석되며 윤씨 족보를 뒤적여보니 현재 파평윤씨 종손의 11대조의 동생인 호(鎬)로 인조 18년인 1646년생이며 그의 증조부는 육아록으로 유명한 윤창원(1551년생)이며 그의 부친은 윤승관(1605년생)으로 늦은 나이 41세에 세째아들 호를 낳았고 원래 영특하고 예뻐 조부와 부친의 각별한 총애 속에서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라다 5세 때 급성장염으로 사망한 것이다. 너무도 애석하여 두꺼운 관 바닥엔 부친의 의류 10여점을 깔고 시신 위엔 모친이 아끼던 의류 10여점을 겹겹이 포개 덮어 온갖 정성과 눈물로 매장한 것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으로 하느님도 감동하셨기에 350년이 지난 후에도 부모님의 옷 속에서 포근히 잠들어 있었나 보다. 고려대 두개골복원팀에 의해 호 소년의 미라를 영구 보존키로 하였으며 탄소분석에 의한 석고로 얼굴을 복원한 결과 절세의 미남 소년임이 판명되었다. 신비의 미라는 자식의 영결종천을 차마 못보던 아비의 구절양장의 처절한 초혼가가 만들어낸 결정체이리라. 필자는 350년을 뛰어넘어 회한 속의 호 소년과 그 부모를 찾아 위로하는 명상에 젖어본다.
- 박재국 통일민주협의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