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산과 들이 오색빛으로 물들고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의 문턱에서 예술에 몸담고 있는 나의 발걸음은 분주하기만 하다. 2002년은 세계무용축제의 개막과 더불어 무용공연이 활기를 띠는 이른바 무용시즌이기 때문이다. 예전과는 달리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공연의 양적, 질적인 변화와 더불어 관객층의 유형도 다양해짐을 볼 수 있다. 서울의 격조 있는 대형극장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을 보면 점점 외국인 관객의 비율이 많아지고 있다. 자국의 공연단체의 공연을 보기 위해, 혹은 주변인의 초대에 응해, 혹은 관광차원에서 극장을 찾는 사람들로 그 유형을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들의 공연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는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십 수년 전에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내게 다가온 문화적 충격은 사람을 대하는 매너에서 오는 차이였다. 뉴욕이라는 거대도시, 그 중심가인 맨하탄 42번가에서 나를 엄습해왔던 거대한 고층 빌딩은 낯설은 땅이라는 것을 충분히 실감하게 했고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배려는 또 다른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유교문화권에 깊이 잠재되어 온 우리로서는 타인에 대해 너무 배타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즉 우리의식, 어찌보면 자기의식을 강조하다보니 자신이 속한 일정한 울타리 안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나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로 인해서인지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무표정을 띠고 있다. 이에 반해 미국사람들은 항상 멀리서 지나가며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하는가 하면 상대방에게 예기치 않은 신체적 접촉이 가해지면 "실례합니다"라는 한마디를 잊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너무 형식적인 면이 없진 않지만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그런 태도가 일상화됨으로써 타인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면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의 차이에서인지 공연을 감상하는 관객의 태도에서 많은 차이를 볼 수 있다. 얼마 전 인천시립무용단의 기획시리즈의 하나로 인천, 미래의 춤꾼이라는 공연이 있었다. 이 공연은 초, 중, 고등학생들이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 외에 50∼60대의 관객이 몇몇 계셨다. 처음에는 관객들이 진지하게 공연을 주시했으나 프로그램이 하나 하나 끝날 때마다 많은 수의 관객들이 일시에 사라진다든다, 공연도중에도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 그리고 때로는 휴대폰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공연을 하고 있는 공연자에 대한 매너, 그리고 그것을 감상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염두해 두지 않은 씁쓸한 모습이었다. 매너, 친절, 미소는 인간이 갖는 가장 아름다운 세계적인 언어이다. 국제화시대를 맞이하고 월드컵, 아시안 게임을 비롯한 세계적 행사를 성공적을 치루어 낸우리지만 이러한 행사를 꽃 피울 수 있는 것은 이를 관심있게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국민들의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시대의 예술은 예술 자체만으로 불가능하며 진정한 관객만이 생명력 있는 진정한 예술을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