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필수 새종대 국제학부 교수]

한·미·일· 대만 '칩4 동맹' 틀린 말
'팹4 협의체 참여' 정도로 해석해야

반도체 옥죄는 美…우리 셈범 복잡
중국 견제 카드 밸류체인 자체 흔들
국내시장 특성상 우려의 목소리

반도체 산업 탈동조화 점진적 진행
초격차 유지 관철…생존전략 세워야
▲ 대만 산학협력의 요람인 신주시(新竹市) 국립칭화대 교정./사진제공=인천연구원
▲ 대만 산학협력의 요람인 신주시(新竹市) 국립칭화대 교정./사진제공=인천연구원

흔히 회자되는 '칩(Chip)4 동맹'이란 것은 거짓말이다. 애초에 그런 말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없는 말을 지어내서 의미하고자 하는 그 뜻도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2월16일 “미-동아시아 반도체 공급망 회복력 작업반(U.S.-East Asia Semiconductor Supply Chain Resilience Working Group)” 회의가 화상으로 열렸다. 미국의 주(駐)타이완협회가 주관하여 한국·미국·일본·대만이 참여한 이 회의는 작년 9월 예비회의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타이페이대표부 관계자를 대표로 하여 외교부와 산업부의 국장급이 참관했다. 이 회의에서는 반도체 공급망 관련 '조기 경보 및 상호 통보' 시스템 구축이 논의됐다. 기업체 인사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것이 소위 '칩4'라고 일컬어지는 것의 실체이다.

그런데 칩4란 원래 없던 말이다. 작년 초 미국이 언급했던 명칭은 칩4가 아니라 '팹(Fab)4'였다. 이 둘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칩'은 반도체 그 자체, 즉 반도체 산업 전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반면, '팹'은 'Fabrication' 즉 설계업체(Fabless)의 위탁을 받아 생산을 담당하는 공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의 '칩'이 탄생하려면 무수히 많은 기기와 부품과 소재가 투입되고 복잡한 공정들을 거친다. '팹'은 그 중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까 미국이 '칩'이 아니라 '팹'을 얘기했다는 것은 자국에 부족한 대규모 제조설비를 가진 나라들과 협력하겠다는 것이지 반도체 생태계 전반을 다루겠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미국은 '칩7'을 조직했을 것이다. 기존 네 멤버에 영국·독일·네델란드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이들 국가들에게 미국의 영향력은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긴 하지만 이들이 어떤 결사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렇듯 팹4를 칩4라고 부르면 미국의 본래 의도를 확대 해석하는 오류에 빠진다. 여기에 '동맹'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 이 오류는 더 증폭된다. 동맹은 무거운 말이다. 한미동맹 같은 용어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듯이, 어느 한 편이 공격받으면 다른 한 편도 나선다는 매우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 말이다. 그런데 팹4는 아직 그럴만한 실체가 없다. 현재로서는 워킹그룹(working group)을 번역하여 우리나라 정부가 공식적으로 칭하는 '작업반' 정도가 가장 적당한 말이다.

 

여기에 '가입'한다는 말은 더더욱 황당하다. 우리가 WTO나 UN에 가입한 것은, 그 대상이 확실한 실체가 있고 멤버쉽에 따른 의무와 권리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팹4에는 그런 실체가 없다. 결국 오염된 언어들을 배제하고 나면 “팹4 협의체에 참여한다” 정도가 적합한 표현이다. 언론에서 말하듯 “칩4 동맹에 가입한다”는 것은 현실을 확대 해석한 결과이다.

그런데 칩4를 팹4라고 옳게 명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미국이 팹4밖에서 도모하는 일에 대응하는 것이다. 2월28일, 미국은 외국 반도체 기업에게 390억 달러의 보조금을 주는 대가로 초과이익 환수, 향후 10년간 중국 투자 금지, 생산시설 접근 허용 등을 요구했다. 또한 미국은 재작년과 작년에 걸쳐 중국에 일정 수준 이상의 반도체 설비 투자를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2021년에는 대만의 주력 제품인 시스템 반도체를, 2022년에는 한국의 주력 제품인 메모리 반도체를 제재 대상에 올렸다. 작년 10월에 “1년 유예”라는 단서와 함께 발표된 이 조치에 따르면 D램은 18나노미터 이하, 낸드 플래시는 128단 이상의 생산 장비를 중국에 들여오려면 미국 상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미국발 제재를 대하는 우리의 셈법은 복잡하다. 그것들이 우리의 경쟁 상대인 중국 기업을 견제하는 효과가 있는 한편, 세계의 공장인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리의 밸류체인 자체를 뒤흔들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이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는 이유는 중국이 세계 최대의 반도체 수요국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전세계 스마트폰의 70%, 노트북의 90%, 자동차의 33%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생산 설비들이 중국을 떠나 다른 곳에 이전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을 두고 반도체 설비만 떠나버릴 수는 없다. 만약 미국이 섣불리 제재를 현실화시키면 우리나라 기업들이 피해를 입는 건 둘째치고, 전세계 공급망에 충격이 닥칠 수 있다.

애플(Apple)의 경우, 아이폰의 98%를 중국에서 만들고 있다. 블룸버그(Bloomberg)는 애플이 중국 생산 비중을 10% 줄이려면 8년이 소요된다고 추산했다. 더구나 그렇게 해서 이윤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감소한다면 애플은 과연 그것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할까? 이윤동기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밸류체인을 인위적으로 떼어내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힘들다.

결국 반도체 산업의 탈동조화는 매우 점진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혹은 저사양 반도체의 생산과 공급은 계속 중국이 담당하고 첨단 반도체에서의 격차 유지를 도모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이것이 세계를 위한 미국의 합리적인 정책방안일 것이다. 우리 기업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에 벌어지는 일들은 미국의 합리성을 의심케 한다. 동맹으로서의 믿음도 의심케 한다. SK하이닉스는 2021년 12월 인텔(Intel)의 다롄(大連) 낸드플래시 설비를 90억 달러에 인수했다. 이때만 해도 미국의 제재는 시스템 반도체에 국한돼 있었다. SK는 인텔의 기존 설비를 기반으로 솔리다임(SOLIDIGM)이라는 신규 법인을 세우고 2022년 5월에 증설을 시작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대로 2022년 10월, 미국의 제재가 메모리 부문으로 확대됐다. 10개월 전의 설비인수와 5개월 전의 증설을 모두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는 치명타였다.

SK측이 미국의 제재 확장 계획을 몰랐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과연 인텔도 몰랐을까? 음모론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것이 우연일 가능성도 받아들여야 하지만 실제로 음모가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한다. 적어도 이 사건을 협상의 레버리지로 활용해야 한다.

우리가 미국에게 관철시켜야 하는 것은 반도체 제재의 점진적 적용 혹은 단계별 적용이다. 또한 미국이 보조금을 앞세워 우리 기업의 생산 기술에까지 접근하려는 움직임도 막아야 한다. 이른바 “초격차 유지” 원칙은 중국에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관철시켜야 한다. 미국이 자국의 법을 외국에게 관철시키려 한다면 우리도 '첨단기술 유출 방지법'이라도 만들어서 명분을 쌓아 나가야 한다.

▲ 지난해 9월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5간담회의실에서 '글로벌 반도체 산업과 칩4동맹'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제공=김홍걸 국회의원실
▲ 지난해 9월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5간담회의실에서 '글로벌 반도체 산업과 칩4동맹'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제공=김홍걸 국회의원실

다시 팹4로 돌아와보자. 최근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팹4라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상생을 위한 동맹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미국의 이기적 정책을 숨기기 위한 허울에 가깝다는 판단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팹4를 역이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자국 기업에 대한 우대를 노골화하자 많은 나라들이 이에 반대하고 있다. 이번 보조금 공지조항에 대만도 당황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팹4를 미국을 설득하는 기제로 활용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반도체 주요국들을 설득하여 '칩7'을 주도적으로 조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 최필수 새종대 국제학부 교수

/최필수 새종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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