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전의 설계자들'

저자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전쟁 당사국들이 원하던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벌였던 또 다른 전쟁, 외교전의 이면을 밝혀내어 그들의 민낯을 소개하고 있다. 청일전쟁부터 50여년간 아시아의 여러 국가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고통에 시달렸다. 전쟁 말고 다른 수단은 없었던 것일까? 만주사변 이후 국제연맹은 침략의 길 대신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평화의 길을 권고했고, 진주만 공습 직전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의 자유무역을 제시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을 내세우며 평화 대신 전쟁을 선택했거니와, 그 길의 끝은 대동아 공멸의 길로 보였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한 이유는 소련을 견제하려는 의도, 즉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약속했던 참전 전에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소련의 참전은 일본 본토에 대한 공동 점령을 주장하려는 의도였다. 소련이 끝까지 이를 고집했을 경우 미국은 일전도 불사했을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점령한 후 지배하게 될 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압박을 받던 천황제 폐지 여론을 끝까지 막아내고자 했다. 천황제 보전으로 전쟁 이후의 일본 국체를 설계하여 향후 태평양 지역의 패권 확보를 위한 불침항모로서의 교두보 구축에 성공했다.

소련은 사할린 지역을 확보해야 태평양 지역의 미국 패권에 대응할 수 있다는 절박함에 대일 참전을 서둘렀다. 종전 서명 이후에도 쿠릴열도의 여러 섬을 점령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했다. 겉으로 일본 본토에 대한 공동 점령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략으로 미국을 압박, 결국 사할린과 쿠릴열도에서 영토 확보에 성공했다. 스탈린은 얄타회담 때 이미 확약받은 한반도 이북 지역 점령 외에도 뤼순항과 다롄항까지 얻어내기 위해 트루먼과 장제스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 스탈린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정부가 통일되기를 바랐으며, 곧 벌어질 국공 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일본은 소련과 맺은 일소 중립 조약의 연장과 그들의 중재로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일본의 지도층들은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보다는 소련의 참전에 '충격'과 '공포'에 빠져 항복했다. 일본은 소련의 본토 공동 점령을 막았으며, 천황제 국체 보전에 성공했고, 천황에 대한 전범 기소도 막아냈다. 천황을 비롯한 일본의 지도층들은 전쟁을 빨리 마무리 지어 자국민들을 고통에서 해방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천황제를 온전히 보전하여 군부의 불만 세력을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쟁이 끝나기를 바랐다. 요컨대 일본의 지도층들은 스스로 전쟁을 종결하기보다 외압에 굴하는 편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 한반도는 분할 점령되어 곧 내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19세기 이후 일본과 서구에 의해 자행된 제국주의 경영과 그 귀결로 벌어진 아시아 태평양 전쟁 최대의 피해 당사자는 다름 아닌 한반도였다. 21세기가 중반으로 접어드는 현재까지 한반도는 동북아시아 열전의 결전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효준 월급쟁이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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