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문화로 식민지화… '문화 통치' 등장
친일 인명사전, 김은호 등 23인 미술인 등재
문체부, 표준 영정 상당수 친일 화가들 그려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 지정 해제 표류 여전

27년 전, 우리 민족은 '국민학교'에 다녔었다. '국민학교'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 지난 1996년 '초등학교'로 개칭됐다. 일본이 '황국신민'을 줄여 '국민학교'로 명칭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로의 개칭은 일제잔재 청산을 알린 신호탄이 됐다.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화두는 항상 뜨겁게 던져진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 지 77년, 대한독립을 외친 지는 무려 103년째가 됐지만, 청산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일제잔재들이 3·1절이 있는 이맘때쯤 수면 위로 올라온다. 우린 여러 일제잔재 속에서도 가장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친일 화가들의 행적에 주목했다.

▲ 이상범 作 산음촌가.                                     /사진제공=부산시립미술관
▲ 이상범 作 산음촌가. /사진제공=부산시립미술관

▲'문화' 라이팅

일제잔재의 대부분은 친일부역자 혹은 친일부역자가 남긴 물적 잔재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이런 잔재들은 미술, 문학, 음악, 연극, 무용, 언론, 종교 등 문화계 안팎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부역자는 모두 4776명으로, 이 중 451명이 문화예술계 인물이다.

일본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총칼로 권력을 행사하는 무력정치가 식민통치를 안정화 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때 등장한 정책이 문화로 식민지화를 꾀했던 '문화통치'다. 당시 일본은 군 사령관이었던 조선 총독 대신 문관 출신을 총독으로 배치했고 착검을 금지하거나 제한적으로 언론과 집회, 출판의 자유를 허용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조선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교묘하게 감시하고 탄압하던 통치 방법이다.

실제 문화통치가 발효되던 1920년에는 경찰서와 경찰 병력이 3배 이상 늘면서 탄압과 감시는 이전보다 강화됐다. 문화통치에는 '친일파'들이 활용됐다. 일제는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해 민족부르주아의 상층부에 편의와 원조 제공을 조건으로 끌어들였고 민족운동을 분열시키는 정책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민족지도자들 가운데 변절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일본인 경찰보다도 악랄한 방법으로 민족말살정책에 가담했다.

▲ 매일신보에 게재된 김은호作 금차봉납도
▲ 매일신보에 게재된 김은호作 금차봉납도

▲화필보국(畵筆輔國)

친일부역자들 중에서도 주류를 형성하던 미술인들은 화단의 중심에 있었다. 이들은 일본 문화정치의 첨병 역할을 했고 그림으로 또는 조형물로 황국신민정책에 가담했다.

구본웅(서울), 김기창(서울), 김은호(인천), 이상범(충남 공주), 장우성(충북 충주) 등 친일 화가들은 현재까지도 미술사에 공로를 세운 것으로 추대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5인의 작가 외에도 23명의 미술인이 수록됐다.

이당 김은호는 1급 친일파 송병준, 민병덕 등의 초상을 제작해 이름을 알렸고 순종의 어용화사로 발탁되면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용화사로 기록돼 있는 인물이다.

당시 김은호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채색화에 중심을 둔 북종화 계열의 작품 활동을 해 왔고 장식적이고 정밀한 필치로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은호는 1937년 11월 일제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를 그린 것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배경이 됐다.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조선인 화가로는 처음으로 심사위원격인 참여작가로 발탁된 직후다. 그림의 주제는 '애국금차회'의 일화를 담고 있다. '애국금차회'는 국방헌금 조달과 황국 원호에 앞장서기 위해 귀족이나 관료 부인 등이 주축을 이룬 친일여성단체다. 애국금차회는 결성식 날 즉석에서 금비녀나 금반지 등 현금 889원90전을 모아 조선군사령부에 헌납했다.

이 광경을 기념하기 위해 김은호는 두 달에 걸쳐 금차봉납도를 그렸고 조선 총독에게 증정했다. 1937년 11월20일자 매일신보에는 금차봉납도를 총독부 내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했고 엽서로 인쇄해 황군 위문대에 보내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총독부에 걸린 금차봉납도와 그 왼편에 선 김은호의 사진이 담겨있다. 특히 1941년 2월 화가로서 천황을 위해 화필보국(그림으로 나라에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 및 회화봉공하고자 결성한 조선미술가협회에 일본화부 평의원으로도 활동했다.

▲ 청전 이상범의 초상사진, 사진가 임응식의 작품
▲ 청전 이상범의 초상사진, 사진가 임응식의 작품

이당 김은호와 함께 양대화맥을 형성했던 인물은 청전 이상범이다. 이상범은 한국의 산수화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 인물로 꽤 높은 가격에 작품이 팔렸다. 김은호가 북종화 계열의 활동을 했다면 이상범은 산수화를 중심으로 한 남종화 계열의 작품 활동을 했다. 황량한 풍경과 짧게 반복되는 갈필의 화풍이 특징이다. 이상범은 동아일보사에 재직 중이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조선미술가협회에 김은호와 나란히 평의원으로 활동해 왔고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세 차례 개최된 반도총후미술전의 일본화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변절을 일삼았다. 반도총후미술전은 황국신민화와 군국주의를 선양하기 위한 전시체제의 공모전이었다. 이상범의 결정적인 친일행적은 일제 말 신문이나 잡지에 군국주의를 담은 삽화를 그린 것이다. 그 예가 매일신보에 개제한 삽화 '나팔수'다. 조선총독부의 대변지인 매일신보는 1943년 8월부터 조선인 징병제를 시행하게 되자 8월1일부터 8일까지 1면에 연재 특집으로 '님의부르심을 받들고서'라는 시화를 기획했는데 이는 조선 징병을 독려하기 위해 제작된 선전물이다.

월전 장우성 역시 대표적인 친일작가로 소개된다. 장우성은 이당 김은호의 문하생으로 화업에 발을 들였다. 그는 인물화에 뛰어났는데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해 정약용, 강감찬, 김유신, 윤봉길, 유관순 등 다수의 위인 영정을 제작했다. 장우성은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에 참석해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국민예술건설(전장에 나가지 않지만 후방에서 태평양 전쟁을 지지하겠다는 의미)' 에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답사를 했다. 조선인 수상자로는 최초의 답사로 기록된다. 이후 경성일보가 주최한 '결전미술전'에 작품 '항마'를 응모해 입상했다. '결전미술전'은 침략전쟁을 부추기는 군국주의 미술전람회로 알려져 있다.

▲ 장우성作 이순신 영정 /사진제공=핀터레스트
▲ 장우성作 이순신 영정 /사진제공=핀터레스트

▲친일의 딜레마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표준영정(위인 초상화) 상당수가 친일행적 논란이 있는 작가에 의해 그려진 사실이 밝혀졌지만, 지정해제에 대해선 여전히 표류 중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과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그린 장우성은 모두 6점의 해당하는 작품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돼 있다. 또 율곡 이이, 신사임당의 영정을 그린 김은호와 세종대왕, 을지문덕 등을 그린 김기창의 영정은 각각 2점과 6점이 지정돼 있다. 2014년부터 꾸준히 지정해제 논의가 이뤄지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표준영정이 실제 모습이 아닌 형태를 국가에서 표준으로 공인한다는 점에는 한계를 드러냈다. 세종대왕 어진을 그린 김기창이 자기 얼굴을 본 떠 세종대왕 얼굴을 그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런 표준영정은 교과서와 조폐에도 쓰이고 있어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장우성 후손이 이순신 영정에 대한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영정의 저작권이 작가에있기 때문이다.

지난 22일자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순신 영정을 그린 장우성의 후손들이 한국은행을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영정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하라는 것이다. 장우성의 친일 논란 이후에 표준영정에서 해제하자는 목소리가 1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지만 여전히 매듭짓지 못했다. 이로 인해 최근 정부는 도안 변경을 검토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외에도 해방 이후 친일 화가들의 서훈을 박탈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친일파 44명에 무려 78건(2017년 기준)의 서훈이 수여돼 논란이 일었다.

이 가운데 김기창은 은관문화훈장을 비롯해 국민훈장모란장, 금관문화훈장 등 무려 3건이 수여됐고 김은호 역시 국민훈장모란장이 서훈됐다.

전문가들은 친일부역자들에 대한 잔재 청산을 위해선 법률 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친일잔재 청산을 하기 위해 법률 제정이 조속하게 마련돼야 한다”며 “현재 광역단체와 기초단체에 잔재청산을 위한 29개의 조례가 있지만 운용되지 못한 채 사문화(死文化)되고 있다. 조례 운영이 활발하게 이뤄졌을 때 법률의 제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친일파의 마스터피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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