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동굴의 본디 이름은 가학광산이다. 가학광산 광업권 기록은 1912년 일본인 반전구일랑(飯田久一郞)이 처음이다. 식민세력은 말 그대로 삼천리 방방곡곡을 뒤져 광물자원을 찾아다녔다. 학이 마을을 빙 두른 모양새여서 가학리라 부르던 마을은 졸지에 광산촌으로 변모해 갔다. 가학산에 묻힌 광물은 금, 은, 동, 아연이었다. 금은 일찌감치 다 파먹었고, 해방 무렵 가학광산에서는 구리와 아연, 납 광석이 채굴되었다. 파낸 광물은 선광과 분광 등 공정을 거쳐 금속성분을 추출한 다음 장항제련소 등지로 실어 보냈다.
해발 220m 남짓한 가학산에 유용한 광물이 꽤 묻혀 있었던 모양이다. 1912년 시작된 가학광산은 1972년까지 60년 동안 가동되었다. 수평·수직 갱도가 7~8개 층을 이루었다 한다. 시흥광산이라고도 불렸던 가학광산의 광업권을 마지막으로 인수한 김기원 씨는 광업권을 갱신하기 위해 돈깨나 들였지만 결국 실패했다. 가학광산은 1994년 완전히 폐쇄됐다. 시기를 굳이 나누자면 1912~1972년이 가학광산 1기, 1972~1994년이 2기쯤 된다. 1기는 전성기, 2기는 암흑기다.
폐광 이후 가학광산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다 파먹은 김칫독은 다음 김장철에 재활용이라도 하지만 광부 떠난 동굴을 활용할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광석을 깨고 부수는 과정에서 나온 찌꺼기(우리말로 '복대기', 한자로 광미) 더미가 작은 언덕을 이루며 쌓여 있었고, 여기서 흘러나온 침출수가 아랫동네 중금속 오염을 야기했다. 그나마 광미 문제는 복토가 이루어져 광명시 자원회수시설이 들어서면서 사라졌으나, 폐갱 용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광업권자는 하는 수 없이 서늘한 갱도를 새우젓 보관 창고로 썼다.
2005년 광명시는 가학광산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정책연구 자료를 발간했다. 이 제안이 현실이 된 것은 2011년이다. 당시 광명시장(양기대)이 우여곡절 끝에 가학광산을 사들였고, 2015년에는 광명동굴이라 이름을 바꾼 다음 관광지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2022년 말 현재 광명동굴은 유료관광객만 700만 명이 다녀간, 수도권 명소로 자리 잡았다. 수탈과 산업화의 현장에서 손가락질받는 폐물이 되었다가 화려하게 부활한 공간의 유전이 흥미롭다.
광명동굴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천일보 2월17일자 '문화예술로 광명동굴 재창조의 기적을') 음악 미디어아트 스토리텔링 전문가들의 제안이 솔깃하다. 다만 오랫동안 명소가 되도록 더 깊이 따져보고 차근차근 준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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