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 말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
간호윤

역시 대학 총장님다웠습니다. 75세인데도 옷차림은 세련되었고 예약된 음식점은 한식으로 정갈한 상차림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자 함께 자리했던 분은 가시고 나와 그 분만 고풍스런 향기가 나는 찻집으로 옮겼습니다. 이 찻집도 총장님의 단골집이랍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 줄기는 요즈음 외국 학생이 많이 들어오는 대학 현실로 들어섰지요. “아! 우리도 옛날에 그렇게 다 외국 가서 박사 따 와서 교수하고 그랬지 뭐. 박사학위 그런 거 대충 줘요.” 학위를 너무 남발한다는 내 말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나도 다 아는 그런 말 말고.” “이번 학기 줌 수업으로 강의해요. 강의료는 없고.” 만난 지 두어 시간 만에 두어 마디 말마다 반말 화법이었습니다. “기타 생략: 더 이상은 기록치 못하겠습니다.” 찻집에 이미 차 향기는 없었습니다. 이쯤 되면 시정잡배가하는 ‘씨알 데 없는 막말’과 무엇이 다른가요. 35년간을 교단에서 보낸 나입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교육자‧학자‧스승]으로서 서로 명예를 존중하고 이해와 배려로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한 진정성 있는 교육 담론이 오가야하지 않겠는지요.

문득 여기가 인사동임을 깨달았습니다. 한 달 전쯤 난 한 뚝심 있는 사내와 이 거리에서 거나하게 취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와 인문학을, 막말정치로 처참하게 무너지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그리고 학문과 정의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내는 혼자 힘으로 월간 인문학 잡지 『퀘스쳔(QUSTION)』을 70호까지 만든 편집주간입니다. 그는 이 ‘막말 전성시대’의 ‘언어혁명가’이기도합니다. 그가 쓴 『퀘스쳔』70호 「여는 말」 서두는 이렇습니다. “막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뒷골목 선술집에서 하는 막말에선 왠지 석쇠구이 냄새가 나고 시골 장터의 막말에서는 인절미 같은 구수한 맛도 난다. 막말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도 아니요, 다 같은 막말도 아니다. 그러나 막말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한다.”

저 분은 대학 총장으로서 지성인이고 학자이고, 종교인이요, 교육자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나보다 많으니 저 이는 선생이요, 난 후생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공자님 말씀 좀 인용하겠습니다. “후생을 두렵게 여겨야 한다. 어찌 후생들이 지금의 나보다 못할 것을 아는가.(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논어』「자한」에 보입니다. 뒤에 태어난 자들이 나이도 젊고 기력도 왕성하기에 나보다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까 ‘후생가외’라는 말은 후생이 젊어 부럽다는 뜻이 하나라면, 내 자신을 갈고 닦으라는 뜻이 겸허히 담겨 있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의 ‘씨알 데 있는 말’입니다. 이런 말들이 ‘씨알’이 되어 널리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아니겠는지요.

그 뒤에 따라붙는 말도 그렇습니다. “40세나 50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짐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또한 족히 두려워할 게 없을 뿐이다.(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라 하였습니다. ‘이 또한[斯亦]’을 곰곰 되짚는다면 불혹(不惑,40세)과 지천명(知天命,50세)이 지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두려울 게 없는 사람 속에 ‘후생’만이 아닌, ‘선생’ 또한 포함되겠지요. 이렇듯 후생에 대해 선생이 되는 게 쉽지 않은데, 우리 사회는 선생의 조건을 ‘배움[학력(學歷)과 지력(知力)]’만을 척도로 보는 듯합니다.

『순자』14, 「치사편」을 봅니다. “남의 선생이 될 만한 네 가지 길이 있으나 널리 배움은 들어가지 않는다.[博習不與] (첫째) 존엄하면서도 꺼릴 줄 안다면[尊嚴而憚] 선생이 될 만하고, (둘째) 나이 들어서도 믿음성을 준다면[耆艾而信] 선생이 될 만하고, (셋째) 글을 외면서도 업신여기거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면[誦說而不陵不犯] 선생이 될 만하고, (넷째) 자질구레함을 알면서도 사리를 밝히려 든다면[知微而論] 선생이 될 만하다. 그래 남의 선생이 될 만한 네 가지[師術有四]에 널리 배움(박학)은 들어가지 않는다.”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온고지신(溫故知新)’ 또한 선생이 생각할 말입니다.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는 뜻으로 흔히들 해석하지요. 이 말은 『논어』 「위정편」의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알면 남의 선생이 될 만하다(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라는 구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옛 것을 배운다함은 옛 것이나 새 것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아야, 즉 전통적인 것이나 새로운 것을 고루 알아야 선생 노릇 한다는 의미입니다. 『선조실록』(1567년 11월 16일)에 보이는 기대승 선생은 이 ‘온고지신’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무릇 책을 건성으로 읽어서는 상세하게 깨닫지 못한다. 한 번, 두 번, 백 번에 이른 연후에 자세히 깨달으니, 이것이 이른바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안다’이다”하였습니다. 선생이란, 옛 것을 익혀 ‘씨알 데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알아 후생에게 ‘씨알의 말’을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산의 나무는 그려도 바람은 그릴 수 없고, 님의 얼굴은 그려도 마음은 그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선생이기에 ‘바람’과 ‘마음’을 어떻게든 배우는 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허나, 어디 쉽게 ‘바람’과 ‘마음’이 보이던가요. 그러니 선생이라 불리는 자들, 저 행간 속을 관류하는 속뜻을 독해하려 입이 부르트고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한무릎공부를 합니다. 큰 의사가 되려 제 팔뚝을 세 번 부러뜨린다는 ‘삼절굉(三折肱)’도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과골삼천(踝骨三穿, 복숭아뼈가 세 번 뚫어 짐)’도 여기에 이유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공부하여도, 모든 선생 된 자는 하나같이 후생에게 학문적으로 죽게 되는 게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니 나이 많다고 선생도 아니요, 배움 많다고 선생도 아닙니다.

씨알 데 없는 글을 매조지 합니다. 우리는 앞에 있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선생, 아니면 후생입니다. 모쪼록 ‘선생’이라면 “사람들의 근심은 남의 선생 노릇을 좋아하는 데 있다(人之患在好爲人師)”(『맹자』 「이루상편」)도, “말 한 번 하고 글 한 줄 써가지고도 남에게 희망과 안정을 주기도 하지만 낙망과 불안을 주기도 한다”(『대종경』 「요훈품」36장)는 말도 가슴에 잘 새겨야겠습니다. 나무에 박은 못은 뽑을 수 있으나 사람의 가슴에 박힌 씨알 데 없는 막말은 뽑히지 않기 때문이다. 저 총장님의 말에서 두 번째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결연한 막말입니다.(첫 번째는 내 가슴에 박혀있습니다.) “나는 100살까지 총장을 할꺼야!”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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