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한중일은 지역적으로나 생태적으로나 교류가 잦았고 그 이유로 모든 문화나 제도가 서로간의 영향으로 비슷한 점들이 많아질 수 밖에 없고 술에 있어서도 그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본의 전통주 '사케'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의 '삭히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게 들릴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는 일식의 형태 가운데 '오마카세'가 우리 말 '맡기세'(요리사에게 메뉴 구성을 맡긴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일본의 전통주 <사케>의 역사에 대하여 간략하게 짚어 본다면 이해를 좀 더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백제인 수수보리가 술을 전했다는 일본 고대의 역사를 몇년 전 후쿠오카 박물관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왜가 백제로 기술을 전파했다고 설명했지만 말이다. 하여튼 일본의 술은 일본의 중세인 가마쿠라시대에 접어들면서 번성하게 된다. 후시미를 중심으로한 교토는 술의 제조와 판매점들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이를 대상으로 주세를 거두게 된다.
에도시대 들어선 1600년경 사케의 대량생산 기술이 개발되고 상류층 소비에서 점차 일반대중으로 확대된다. 술 소비량이 많아져 식량사정이 원할치 못하자 통제수단으로 양조면허제가 실시되고 술전문가 집단인 도지(杜氏)가 생겨난다.
1875년 메이지정부는 일체의 규제를 철폐하고 양조기술과 자본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주조할수 있게 법을 바꾼다. 이 때문에 일년에 3만개가 넘는 사케구라(술도가)가 탄생하는 전성기를 맞는다.
이후 점차 주세가 강화되면서 숫자가 줄어들어 1882년에는 3만개이던 구라모토가 1만6천개, 1945년경에는 4,000개 정도로 감소하고 현재는 1,500개의 양조장이 남아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1897년 당시에는 일본 국세에서 주세가 차지하는 비율이 33%에 달할 정도로 중요한 산업이었다.
따라서 메이지 정부는 막대한 정부 자금을 투자하여 일본의 양조산업 근대화를 위한 투자를 단행한다. 1904년 일본 대장성 산하에 국립양조시험소(현재의 주류종합연구소)가 설립. 일본 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어낸다. 나는 이런 부분이 몹시도 부럽다.
1911년 전국신주감평회가 개최되고 이 감평회를 계기로 유명한 술의 맛과 향의 근간인 효모들의 등록과 확산, 보급이 이루어지면서 사케의 대중화와 고급화가 함께 이루어진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사케에 양조알콜을 넣는 합성청주제법이 특허(1920년)를 받게 되면서 점차 삼증주(산바이조조세이슈) 술로 만들어지는 바탕이 된다.
전후 물자부족으로 인해 만들어진 삼증주란 '모로미'라는 술 짜기 직전의 원주에다 양조알콜을 넣고 거기다 감미료를 넣어 3배의 술을 만들어낸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쉽게 말해서 술을 빚고 거기다 주정을 넣어 양을 불린 것을 말한다.
기타 사용 원료로는 포도당, 수태, 유산, 호박산, MSG 등을 넣었다. 우리나라의 희석식 소주의 원조인 것이다. 이런 형태의 술은 사케를 나쁜 술의 이미지로 낙인시켜 소비가 점차 줄어드는 쇠락의 길을 걷게된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쌀을 깍아내는 정미기술의 발달로 도정율을 높여 고급주인 준마이(純米酒)계열의 술을 만드는 토대를 만든다.
쌀의 겉면에는 단백질 성분이 많아서 술로 발효하게되면 그다지 좋은 향을 낼수가 없다. 따라서 겉면을 많이 깍을수록 좋은 향이 나오게되고 이러한 도정율이 많을수록 고급술이 빚어지게 된다.
1960~197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식생할이 서구화하면서 맥주가 대거 유입된다. 맥주의 성장은 반대적으로 사케 시장을 축소시켰고 그 맛도 변화시켰다. 단맛이 대세이던 사케가 드라이하거나 신맛이 강한 쪽으로 변화했고 값싸고 감미료를 넣은 삼증주에 대한 반발과 맛에 관한 관심의 증가로 여태까지 없었던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부는 전통주에 대한 현상이 어쩌면 수십 년 전 일본의 경우와 비추어 생각하면 지나친 기시감일까? 몇 달 전 강남 코엑스에서 개최된 전통주축제에서 신맛이 강한 전통주 양조장 부스 앞에 길게 늘어선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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