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립박물관 6월부터
'무네미 넘어 벌말까지…'
동네 기억 남기려는 취지
산업유산 연구 작업도 병행
▲ 인천 동구 화도진공원 위에서 바라본 화수화평 재개발 구역 전경.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재개발을 앞둔 인천 원도심인 화수동·화평동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특별전이 열린다. 개발 과정에서 철거로 사라질 수 있는 산업유산이나 민속자료 등을 포함한 지역사를 연구하는 작업도 병행된다.

인천시립박물관은 동구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과 공동으로 오는 6월부터 두 달여에 걸쳐 '무네미 넘어 벌말까지, 화수·화평동'을 주제로 기획특별전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1일 밝혔다.

이번 특별전이 조명하는 동네는 재개발 절차가 진행 중인 화수화평 구역이다. 전시 주제에서 언급한 '무네미'는 바닷물이 넘어 들어와 '무너미'로도 불렸던 화수동을 일컫는다. '벌말'은 평평한 벌판에 동네가 있다는 우리말 지명으로, 한자로 바꾼 이름인 '평동(平洞)'이 지금의 화평동으로 이어졌다.

화수화평 특별전은 시립박물관과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공동 조사하는 지역사 결과물을 기반으로 한다. 마을 현장 전시도 기획되고 있다. 배성수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화수화평은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곳”이라며 “동네가 재개발되기 전에 기억을 남기려는 취지”라고 말했다.

화수화평 재개발은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지 10년 만인 지난 2019년 시공사가 선정되며 본궤도에 올랐다. 화평동 세숫대야냉면거리 북측부터 화수사거리까지, 동서로는 화도진공원 경계 지점에서 송현초등학교까지가 재개발 구역에 해당된다. <인천일보 2022년 11월24일자 1·12면 '화수화평의 봄여름가을겨울'>

화수화평 재개발 면적은 18만998㎡로, 인천 58개(지난해 11월 말 기준) 재개발 구역 가운데 두 번째로 넓다. 전기원 화수화평 구역 조합장은 “건축 심의와 문화재 심의 신청을 앞두고 있다”며 “내년 상반기 사업시행 인가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했다.

시립박물관과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은 특별전에 앞서 화수동과 화평동 일대를 공동 조사한 도시생활사 보고서를 올 초 발간하기로 했다. 김성이 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산업유산과 생활사 관련 실물 자료 등을 전시하고, 과거 기록을 찾아 사진과 함께 시각화하려고 한다”며 “가옥과 민속, 인물 등 지역사 전반을 다루는 방향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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