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 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 가수 god <길>.
더러는 사람의 일생을 계절에 비유하곤 하는데, 동지冬至 즈음의 이 시기를 말년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누구나 저마다의 길을 걷는다. 무엇이 소중한가? 돈인가 명예인가 사람인가.
貴(귀)는 소중하고 귀함을 말하고, 生(생)은 삶을 말한다. 도덕경 제50장 貴生(귀생-아주 소중한 삶)에서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무엇이 중요한지를 밝히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살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탄생과 죽음의 사이에 있는 기간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 삶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 왜 그럴까? 노자는 그 이유를 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 두고 있다. 그것은 재물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이다. 재물이 없으면 강도를 만날 이유가 없고, 권력이 없으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방을 받을 이유가 없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화를 당할 염려가 없고 그런 사람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없다. 귀한 삶이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을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에서 厚(후)는 육체적인 삶에 치우쳐 사치스럽고 과식하며 욕심을 부린다는 뜻으로 썼다. 攝生(섭생)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서 오래 살기를 꾀한다는 뜻으로 養生(양생)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는 건강관리를 넘어 인생 전체를 잘 다스린다는 뜻으로 썼는데, 위정자는 도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고 백성의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품는다.
사람의 일생은 삶에서 나왔다가 죽음으로 들어간다. 삶의 길을 따르는 무리가 열에 셋이요, 죽음의 길을 따르는 무리가 열에 셋이며,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에서 나와 죽음의 자리로 움직이는 무리 역시 열에 셋이다. 왜 그러한가? 모두 삶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듣자하니, 섭생을 잘 하는 사람(이타적인 사람)은 험한 뭍으로 다녀도 코뿔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군대에 가서도 갑옷으로 무장한 상대편으로부터 습격을 받지 않는다. 코뿔소가 그 뿔로 들이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고, 병사는 그 예리한 날로 베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그런 사람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기에 죽음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①貴(귀)는 갑골문에서 두 손(臼구)으로 흙덩이(土토)를 움켜쥔 모습이었다. 여기에서 농업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②점차 흙덩이는 중요하고도(中) 소중한 재물을 상징하는 貝(패)로 바뀌어 貴(귀)가 되었다. ‘귀중함’이 농사를 짓는 흙(土)에서 재물과 돈(貝)으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자식으로부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저의 아버지입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이보다 더 소중한 삶은 없다. “부모님 생각하면 늘 미안하죠. 잘해야지 그러다가 또 못하고, 잘해야지 그러다가 또 못하고...” - 김광석 사망 6개월 전 <어느 60대 노부부이야기>를 부른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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