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포(典當鋪)는 물건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사금융업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엔 개화기 때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전당포를 세웠다고 한다. 은행을 이용할 수 없는 서민들이 급전을 구할 수 있는 유용한 역할을 했다. 신용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전당포 대출은 서민들에겐 마치 목마른 이에게 갈증을 해소하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요즘은 급하면 은행으로 달려가거나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는 등 '신용사회'로 진입한 까닭에 전당포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전당포는 1960~70년대엔 TV·냉장고 따위의 가전제품을 자주 담보로 잡았고, 1980년대 들어선 비디오와 컴퓨터가 주를 이뤘다.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금·은 등 귀금속이 단골 품목이다. 때론 명품과 차량 등 비싼 물건을 담보로 잡힌다. 이러다 보니 전당포를 상대로 '짝퉁'을 맡기려는 시도도 일어나지만, 곧 들통이 난다고 한다.
1970년대만 해도 중구 동인천 일대엔 전당포가 정말 많았다. 각종 유흥업소가 즐비해 먹고 즐기던 젊은이들이 모자라는 유흥비를 감당하려고 전당포를 들락거렸다. 당시엔 주로 시계나 반지 등을 맡기고 알량한 돈을 융통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처지의 신혼부부들이 전당포를 찾아 아기 돌반지를 맡기고 생활비를 댔던 기억도 새삼스럽다. 오죽하면 여북할까. 전당포를 기웃거리며 삶을 꾸려나갔던 서민들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듯하다.
개항도시 인천은 근대 전당업과 맥을 같이한다. 1883년 개항 이후 외국인과 서양문물이 대거 들어와 상업도시로 성장하면서 전당업도 활성화했다. 인천대 인천학연구원이 펴낸 '신찬인천사정(新撰仁川事情)'을 보면, 개항 직후인 1897년 현 중구 일대엔 11개의 전당포가 운영됐다. '인천개항 25년사'는 1901년 5월 인천전당포조합까지 설립됐을 정도였다고 밝힌다.
본보가 기획취재한 '전당포에서 삶을 보다'에 따르면, 전당포를 찾는 인천시민들의 발길이 늘어난다.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불경기에 시민들의 살림살이가 팍팍해져서다. 치솟는 물가에다 이를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이 계속되면서 이들은 울상을 짓는다. 인천지역 금융기관 가계대출이 지난 7월 1363억원에서 8월 2557억원으로 급증한 폭만 봐도, 서민들의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헤아릴 수 있다.
서민들은 고금리와 고물가 등 경기악재로 금융권이 아닌 전당포를 통해 소액을 빌리기 일쑤다. 급하게 돈이 필요해도 은행창구를 이용할 수 없다 보니, 마지막 창구인 전당포를 찾고 있다. 서민들의 생활이 담긴 전당포는 시대 흐름을 엿볼 수 있어 나름대로 가치를 지닌다. 사회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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