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삶, 오죽했으면…소중한 물건 안고 문 두드린다"

제도권 사금융 하나로 급전 창구
각양각색 이유로 찾아오는 사람들
“장사 어려워 급전 마련하러 왔어요”
“항상 끼던 반지 맡기기로 결심했죠”

소상공인, 금리·환율·물가 '3高'시름
서민들 대출 이자 상승 부담 호소도
전당포 “하루 1명-> 2명 손님 늘었죠”

'인천 부두노동 불황으로 빈민들이 전당포로 몰려들고 있다.'

1934년 10월 28일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기사다. 당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일노동자 수가 조선 1위인 인천에서 빈민들의 전당포 방문이 늘고 있다는 내용이다. 기사에 따르면 1년간 주민 10만181명이 전당포를 찾아 23만1486원의 물건을 맡긴 것으로 파악됐다. 이 현상의 원인은 부두노동의 불황으로 꼽혔다.

전당포는 예부터 서민 경제를 헤아리는 창구였다. 은행과 신용카드가 활발해지면서 전당포를 찾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줄어들었지만, 전당포를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금융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사정을 살필 수 있는 장소로 전당포가 아직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김하운 전 한국은행 인천본부장은 “과거 전당포는 사건·사고에 휩싸였기에 부정적으로 비쳤지만 현재는 제도권 안에서 운영되고 있는 사금융의 하나”라며 “서민 애환과 함께해온 전당포는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내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경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창구로 역할을 해오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각양각색의 이유로 전당포를 찾아와야만 하는 고단한 삶을 창살 너머에서 엿봤다.

 

▲ 전당포에 맡겨진 전당물. 한돈 짜리 금붙이.
▲ 전당포에 맡겨진 전당물. 한돈 짜리 금붙이.

#전당포로 향한 이런저런 사연

인천 한 지하상가에서 옷가게를 하는 40대 신모씨는 최근 전당포를 찾았다. 코로나19 여파로 장사가 잘 안되자 임대료와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방문한 것이다. 그가 맡긴 것은 14K 금으로 된 여러 가지 액세서리 무더기였다. 당시 시세로 약 200∼300여만 원을 융통할 수 있었다.

꼬박꼬박 이자를 내던 그는 끝내 사정이 안 좋아지자 물건을 포기했다. 당장에라도 물건을 찾고 싶었지만 코로나19 고비를 넘어섰다 싶었을때 또다시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물건을 되찾을 여력이 안 된 것이다. 이런 그의 사연을 안 전당포는 물건을 처분하지 않고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맡아주기로 했다. 전당포는 일정 기간 물품을 보관하고, 이자를 내지 않거나 맡긴 이가 물건을 포기할 경우 임의로 처리할 수 있다.

신씨는 “지난해도 문을 닫을 수는 없어 장사를 했는데 옷을 가져오는 비용부터 전기세까지, 손바닥만 한 가게를 유지하는 모든 게 돈이었다”며 “급하게 현금이 필요해 금융권 대출을 받을까 고민했지만 대출 심사 기준이 강화돼 인근 전당포로 발길을 돌렸다. 제1·2금융권보다 이자가 높지만 물건에 대한 가치만 묻고 돈을 빌릴 수 있어서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계속된 경기불황으로 가계 수입이 줄어든 60대 여성 A씨 역시 전당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물가는 오르고 있지만 들어오는 수입은 줄어들다 보니 사실상 생활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생활비가 부족해지자 A씨는 결국 항상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맡기기로 결심했다. 반지와 약간의 금붙이를 모으니 약 8돈. 시세로 200여만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중구 B전당포 대표는 “가계에서 주로 돈 관리를 하는 것은 여성이다 보니 생활비가 부족해서 금을 맡기러 오는 여성들이 많다”며 “그동안 경험으로 볼 때 생활비에 보탬이 되려고 잠깐 돈을 빌려 가는 사람들은 상황이 나아지면 물건을 금세 찾아간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밖에도 대부라고 적혀있어 신용대출이나 땅, 자동차 등을 담보로 맡기려고 오는 사례도 종종 있다”며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사연이 있듯 전당포에 맡겨진 물건에도 애달픈 사연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전당물은 보관 기간 이상 저당을 잡고 기다리게 된다. 얼마나 소중한지 그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 인천 중구의 한 전당포.
▲ 인천 중구의 한 전당포.

#녹록지 않은 서민 경제, 전당포 문의 늘어나

서민 경제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전통시장에서 점포를 운영하는 이모(67)씨는 텅 빈 길거리만 보면 한숨이 나온다. 코로나19 사태만 버티면 풀릴 것 같았던 경제는 오히려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고금리, 고물가, 고환율 3고(高) 악재가 겹치면서 골목상권 경제가 휘청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씨는 “코로나19 때는 경제 살리겠다고 지원금이 나오니깐 사람들이 그걸 쓰기 위해서 찾아왔다”며 “그런데 지금은 뭐 그런 게 없다 보니 손님들이 확 줄어들었다. 장사가 안되는 것도 문제지만, 치솟는 물가도 골치다. LPG 가스 한 통이 작년에는 2만8000원이었는데 지금은 4만원에 육박한다. 식용유 등 재료비도 계속 올라서 이번 겨울은 더 추울 것 같다”고 걱정했다.

음식점을 하는 전모(51)씨도 “인건비 등을 줄이면서 장사를 이어왔는데 불황의 끝은 보이지 않고 계속 악화하기만 한다”며 “산 넘어 산이라는 말처럼 한고비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있으니 막막하다. 얼마나 더 어려워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말했다.

경기가 악화로 소상공인뿐 아니라 서민들의 어깨도 무거워지고 있다.

고금리에 따른 대출이자 부담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높아진 물가에 지갑은 꾹 닫혔다.

서구 주민 김모(29)씨는 “3년 전 전셋집을 구하는데 모아둔 돈이 부족해 대출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2%였던 이자가 이제는 4%를 훌쩍 넘어섰다”며 “달마다 은행에서 금리 변동 문자가 날라오는데 확인하기가 겁난다”고 호소했다. 이어 “높아진 대출이자를 감당하느라 외식, 취미 비용 등을 줄이며 아끼고 있는데 해결방법이 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이런 어려움은 고스란히 전당포에도 반영된다.

리먼브라더스 등 굵직한 경제 위기가 있을 때마다 전당포는 손님들이 늘면서 이른바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

중구 B전당포 대표는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벌어진 그해 전당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쉴 틈이 없었다“며 “그 당시만큼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서 급전이 필요해 전당포를 찾는 사례가 많아지는 분위기다. 체감상 이전에 일평균 1명 정도 찾아왔다면 지금은 2명으로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미추홀구 C전당포 대표도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문의 전화가 늘었는데 대부분 담보와 관련된 것”이라며 “최근 주방용기, 사무용품 등을 저당 잡고 현금을 빌릴 수 있는지 묻는 경우가 있었는데 얼마나 급하면 문의를 했을까 싶다. 하지만 전당포에선 주로 취급하는 것이 금이다 보니 저당을 잡고 돈을 내어줄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글·사진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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