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사람은 늘 있어…문 닫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1973년 父소개로 첫발…1980년 홀로서기
어깨너머 배워 최고급 금·다이아 등 감정

전당포, 은행 못가는 사람들 마지막 보루
밀려나면 불법 사금융 내몰리는 걸 아니까
담보 기간 연장·추가금 융통 등 배려 노력

IMF시절 '금 모으기' 때부터 업종 쇠락
2008년 리먼브라더스 위기때는 호황
요즘 '불황' 체감…국민들 잘 버텨낼 듯
▲ 1973년 전당포에 처음 발을 디딘 허희승(가명)씨. 49년이 지난 지금도 인천 중구 역전에서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다. 희승씨는 은행 문턱이 높은 서민들에게 담보를 받고 돈을 내어준다.
▲ 1973년 전당포에 처음 발을 디딘 허희승(가명)씨. 49년이 지난 지금도 인천 중구 역전에서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다. 희승씨는 은행 문턱이 높은 서민들에게 담보를 받고 돈을 내어준다.

'전당포, 대부 3F'.

빨간 글씨로 적힌 간판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사람 한명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계단을 타고 숨 가쁘게 올라가다 보면 철문에 다다른다. 문턱을 넘자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딩동' 소리와 함께 주인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전당포 주인장 허희승(가명·68)씨는 창살 넘어 손님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허씨는 49년 동안 인천 중구 동인천역 인근에서 전당포를 하고 있다.

 


 

▲ 학교 준비물로 샀던 주판은 희승씨와 여전히 동고동락 중이다. 아직도 계산기보다 주판이 친숙해 꺼내보곤 한다.
▲ 학교 준비물로 샀던 주판은 희승씨와 여전히 동고동락 중이다. 아직도 계산기보다 주판이 친숙해 꺼내보곤 한다.

#희승씨 전당포의 과거와 현재

가장 따뜻하고 눈이 적게 내린 겨울로 기록된 197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희승씨는 아버지 소개로 전당포에 처음 발을 디뎠다. 당시 한국사회가 본격적으로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전당포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옷가지와 선풍기 등 간단한 전자제품이 담보물로 오갔다. 당시 집안에서 이른바 돈 되는 물건들이었던 셈이다.

“전당포는 생활에 쓰이는 사소한 물건들에 경제적 가치가 매겨져 돈으로 환전되는 곳이었어요. 저는 처음에 물건 감정하면 책정되는 돈을 주는 역할을 했어요. 그땐 각종 사람이 찾아오고, 양단 한복부터 전축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모여들다 보니 그저 신기하고 정신이 없었죠.”

어깨너머로 감정 솜씨를 배우던 희승씨는 금과 다이아몬드, 최고급 시계를 알아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1980년 홀로서기를 결심한 그는 본인만의 전당포를 꾸려 지금까지 운영 중이다.

희승씨네 전당포가 오래 운영될 수 있었던 비결은 담보가 아닌 사람을 본다는 것이다. 전당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과 신뢰가 바탕으로 깔린 약속을 전제로 이뤄지는 거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허씨의 전당포는 단골손님들이 주를 이룬다.

“혼자 전당포를 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장물을 맡기러 오는 사람도 있었고, 형편이 어려워 부모님의 유품을 맡기러 오는 사람도 있었죠. 별별 사람들을 만나면서 중요한 건 담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이 나이까지 일할 수 있었던 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뿐이기도 했지만 저를 믿고 물건을 맡겨준 손님들 덕분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전당포는 물건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깐요.”

오랜 세월 희승씨가 전당포 일을 하면서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많다는 것이다.

호황을 누리던 전당포는 오늘날 신용카드와 은행, 보험회사, 대형 대부업체에 밀려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지만 스러지지 않고 골목길 뒤편에 공고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소득·저신용자인 금융 취약계층은 제도권 금융에서 대출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대부업체나 전당포는 마지막 보루다. 여기서 밀려나면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려야 하는 상황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시대가 변해도 어려운 사람은 늘 있어요. 전당포가 문을 닫을 것 같아도 문을 닫지 못하는 이유에요. 은행을 못 가는 사람들에게 이곳이 마지막이에요. 여기 아니면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려야 하는 걸 아니깐 저는 최대한 해줄 수 있는 배려는 해주려고 합니다. 이 나이에 돈을 벌어봤자 얼마나 벌겠나 싶은 생각이죠. 그래서 담보 기간을 늘려준다거나 맡아둔 담보가 몇 년이 지났을 때 값어치가 오르면 그에 따른 추가금을 융통해준다거나 이런 식으로 도울 수 있는 건 도우려고 합니다.”

 

▲ 손때가 가득 묻은 저울은 담보에 경제적 가치를 매긴다. 한쪽에 추를 달고 반대쪽에 담보를 놓는다. 무게에 따라 담보의 가격은 오르락내리락한다.
▲ 손때가 가득 묻은 저울은 담보에 경제적 가치를 매긴다. 한쪽에 추를 달고 반대쪽에 담보를 놓는다. 무게에 따라 담보의 가격은 오르락내리락한다.

#8평 남짓에서 체감하는 경기불황

전당포는 서민들의 시름을 바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희승씨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일명 'IMF 사태'가 터졌다. 1997년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외환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면서 국외 자본을 끌어다 쓰던 국내 기업들도 줄폐업하기 시작했다. 경제가 얼어붙으면서 돈이 오가던 전당포에도 적잖은 피해를 미쳤다.

1998년 전국적인 금 모으기 운동이 전개되면서부터 전당포는 급격히 쇠락 길에 접어들었다. 언론에서는 사회 각계의 금 모으기 운동 참여 소식을 전했고, 국민에게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할 당위성을 부여했다.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내용이 주로 보도됐다.

상황이 이렇자 전당포의 주요 담보로 취급되던 금 거래는 자연스레 줄었다. 전당포는 하나둘 셔터를 내렸고 희승씨네도 손님 발길이 줄었다.

“금고에 물건이 절반 이상이 빠져버리면서 생계 유지하기가 힘들어진 몇몇 가게들은 문을 닫았어요. 제가 아는 지인은 미추홀구에서 전당포를 운영했는데 버티다가 끝내 폐업 신고를 했어요. 전당포는 이자를 먹고사는데 물건이 적어지니 수입이 적어진 거죠. 전 그때 그렇게 많은 양을 거래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별 타격이 없었습니다. 남들이 버는 것보다 그리 크게 벌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높낮이가 심하지 않아서 버틸 수 있었어요.”

반면 한국사회 두 번째 큰 경제 위기인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때 전당포는 호황을 이뤘다. 문턱이 닳을 정도로 사람들은 전당포를 찾았다. 희승씨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거래해 보기도 한 해였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경제가 안 좋았던 거로 기억해요. 오래 앉아 있을 시간도 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그때 준비해 둔 현금이 부족해서 곤란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두 번의 굵직한 경제 위기를 겪은 희승씨는 요즘 날 과거 경제 불황 시기가 떠오른다. 텔레비전에서 경제가 어렵다는 뉴스가 쏟아지고, 전당포를 찾는 이들의 발길이 부쩍 늘어나고 있어서다.

“불황은 불황인가 봐요. 요즘 텔레비전을 틀면 온통 경제 얘기가 나오잖아요. 그리고 근래 손님이 살짝 늘어났습니다. 체감상 이전에는 하루 평균 한두 사람이 왔다면 지금은 2∼3명은 오는 것 같아요. 신용 대부 문의도 종종 찾아오는 걸 보니 정말 세상이 어렵구나 싶죠.”

희승씨에게 경제는 넘실대는 파도다. 높이 올랐다가 내렸다 하는 물결의 반복이 경제인 것 같다는 게 희승씨 생각이다.

“40여년 넘게 돈을 만지다 보니깐 경제 위기는 몇 년 주기로 오는 것 같아요. 근데 경제가 나쁘다고 해도 이전에 경험했잖아요. 예를 들면 면역주사를 맞은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이번 경제 위기 어려움도 잘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늘 그랬듯이 말이죠.”

/글·사진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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