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8월24일 중국 베이징에서 한중 수교 공동성명이 맺어졌다. 두 나라가 빗장을 연 지 30년이 된 현재, 인천은 중국 교류의 거점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중국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과 항구도시 장점을 살린 인천은 수많은 중국인들과 한국계 중국인, 대만인들을 포용하고 있다. 인천일보는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아 인천에 정착한 중국 본토인들의 희로애락을 들어봤다.
정착 4년차 연문연씨
“양국갈등, 국가간 문제일 뿐…친절 속에 즐겁게 일해”
사업차 중국 온 남편 통역 맡아 인연
결혼·한국행에 부모님·친구들 응원
남동구가족지원센터 통·번역사로
작년부터 한국어 서툰 중국인 도와
중국인에 한국문화역사 소개가 꿈
“인어아가씨”. 연문연(35)씨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어릴 적 가족과 함께 봤던 한국 드라마는 그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엄마와 할머니가 한국 드라마를 좋아했어요. 그 영향을 받았나 봐요. 같은 아시아인데 문화가 이렇게 다르구나, 흥미로웠죠.”
연씨의 한국어 실력은 원어민 못지않다. 회계를 전공한 그는 한국과 무관한 일로 사회 첫발을 내딛었지만 숙모 권유가 그를 끌어당겼다.
“중국 박물관에서 해설원으로 일했는데 숙모가 한국어나 일본어를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학원을 다니게 됐어요. 그 뒤 통역 일을 했죠.” 특히 한국어는 연씨와 남편을 이어주는 고리가 됐다. 인테리어 일을 하며 중국을 오가던 한국인 남편 통역을 당시 연씨가 맡았기 때문이다. “통역 해줄 땐 서로 애인이 있었어요. 그러다 2017년 사드 문제로 양국 관계가 나빠져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갔죠. 그 뒤 서로 연락하고 지내다 연인으로 발전했어요.”
연씨가 2019년 한국에 완전히 들어온 까닭도 결혼 때문이다. 연씨 부모는 하나 밖에 없는 외동딸 결정을 흔쾌히 응원했다.
“부모님이 개방적이라 반대는 없었어요. 고향인 난징(南京市)에서 비행기면 2시간도 안 걸려요. 코로나19 전에는 하루 두 대나 다녔고요.”
연씨는 지난해 8월부터 남동구가족지원센터 통번역사로 일하고 있다. 한국어가 서툰 중국인들을 돕는 게 주된 일이다.
“처음 한국에 와서 숭실대 국어국문학과로 편입했어요. 수업하다 아는 언니가 다문화센터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알려줬어요. 저는 그런 센터가 있는지 몰랐거든요. 센터 직원들이 다들 잘 대해주셔서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연씨의 바람은 크지 않다. 한국에서 이룬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하루하루 기분 좋고 건강하게 살면 좋겠어요. 한국 박물관에서 중국인들에게 한국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일도 해보고 싶고요. 주변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한국에 친근하고 호의적이에요. 사드 문제처럼 양국이 안 좋을 때도 있었지만, 그건 국가 간 문제에 불과합니다.”
정착 15년차 부옥향씨
“눈물나게 외로운 날들, 아들·이웃 없인 못 버텼어요”
한국어 못하고 아는 사람도 없던 때
무관심한 남편 탓에 종일 아이만 봐
출산 반년 만에 이혼 후 고향 돌아가
아들 '뿌리' 지켜주려 용기내 재입국
이웃들 집계약·생활용품 도움 큰 힘
“남편 따라 한국에 오자마자 임신하고 아이를 낳았어요. 아는 사람도, 할 줄 아는 한국말도 하나도 없어서 온종일 아이만 봤죠. 눈물이 날 정도로 외로웠어요.”
2007년 중국 연변에 살던 부옥향(42)씨는 한국인 남편을 따라 서울 성동구 마장동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행복할 줄 알았던 한국 생활은 무관심한 남편 탓에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부씨는 당시 홀로 병원에 갔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스마트폰이나 번역기도 없던 시절, 아픈 몸을 이끌고 겨우 병원에 갔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짓, 발짓으로 증상을 설명하고 약만 처방받아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는 “의사 선생님은 제가 어디가 아픈지 이해했을까요? 전 의사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약 받아오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부씨는 출산 6개월 만에 젖먹이 아들을 데리고 남편과 이혼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들이 5살 때쯤 다시 한국으로 왔다.
부씨는 “아들은 한국인이잖아요. 한국에서 살지 않으면 본인의 뿌리를 영영 잃을 것 같았어요”라고 설명했다. 아이가 클 때까진 한국에 살자고 결심한 그는 인천 부평구에 자리 잡았다. 여전히 힘들고 외로웠지만 일하며 알게 된 이들 도움 덕에 무사히 정착했다.
“일하면서 알게 된 언니들은 집 계약 등 어려운 일에 함께 해줬고, 적십자사에선 생활용품을 주기적으로 보내줬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 더 커져요. 대가 없이 도움을 준 거잖아요.”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어느새 15년이 흘렀다. 작고 여렸던 아들은 훌쩍 커 중학생이 됐다. 이젠 부씨가 모르는 게 있으면 아들이 알려줄 정도로 의젓하다.
그의 한 가지 바람은 '내 집 마련'이다. 부씨는 “외국인도 주택 청약이 되나요? 아들이 제 품을 떠나기 전까지 함께 살 수 있는 집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어요”라며 웃었다.
인천 10년간 중국인 증가율 '광역단체 2위'…일자리 많은 부평·미추홀·남동구에 몰려
최근 10년간 인천지역 중국인 증가율이 전국 광역 단위 지자체 중 두 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4일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자료를 분석해 보니 '등록 외국인' 기준 인천 중국인 수는 10년 전보다 약 20% 늘었다.
2012년 6월 말 기준 인천 등록 외국인 중 중국인은 총 2만2530명(한국계 중국인 1만5048명·중국인 7482명)에서 올 6월 말 2만7999명(한국계 중국인 1만7470명·중국인 1만529명)으로 5469명(20%) 증가했다.
특히 인천 등록 외국인 6만7664명의 41%가 중국인으로 집계됐다.
전국 16개 시·도(세종시 제외) 중 중국인 수가 10년 전보다 는 곳은 인천과 제주도, 경기도 세 곳뿐이다. 10년 전 2890명에 불과했던 제주도 중국인들은 현재 8684명까지 늘어 증가율 300% 수준이다. 경기도는 10년 전보다 300명 늘어 증가율로 보면 0.1%에 그쳤다.
올 6월 말 기준 중국인은 경기도(16만7178명)에 가장 많고 이어 서울(12만5729명), 인천 순으로 많았다. 10년 전 역시 광역 지자체들 중 같은 순으로 중국인들이 많았다.
인천 내부를 들여다보면 10개 군·구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몰려 있는 지역은 부평·미추홀·남동구 세 곳이다. 올 6월 말 중국인 2만7999명 중 70%에 달하는 1만9486명(부평구 1만687명·미추홀구 4711명·남동구 4088명)이 세 지역에 살고 있다.
이는 일자리 문제와 관련 있어 보인다. 세 지역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일하는 대규모 국가산업단지들이 자리 잡고 있다.
/글·사진 이창욱·전민영 기자 chuk@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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