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김양겸(金讓謙) 여사.

황해도 장연군 출신의 고 김양겸(金讓謙) 여사. 그녀는 아버지 김병욱과 어머니 최익구 여사 사이의 둘째 딸로 1921년 6월5일(음) 태어나 2022년 1월31일(양) 향년 102세로 타계했다. 그녀의 삶의 여정은 일제 강점기 3·1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태어나 광복과 6·25 전쟁 등 생사를 넘나드는 세월을 겪었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물결 속에 우리나라의 변천 과정을 함께한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었다. 특히 김양겸 여사의 백령도 천주교 전교(傳敎) 활동은 광복 전 초대 면장이었던 조상현이 전교한 이래 30년이 지나 풍전등화 같은 천주교에 싹을 틔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이는 6·25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3대 면장을 역임한 최경림과의 결혼이 전환점이 됐다.

 

▶지역의 민간 신앙 속에서 천주교로 맺어진 부부의 연

백령도 진촌 출신의 최 면장은 인당수의 험한 물살을 헤쳐 이웃 황해도 장연의 김양겸을 만나 1945년 해방 전에 결혼했다. 결혼의 조건은 교리문답 320 조목을 통한 천주교식 절차였다. 6개월 동안 교리를 공부하며, 결혼 조건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최 면장은 천주교의 기본 지식 및 신앙심의 내재화가 이뤄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1945년 당시 백령도의 신앙 형태는 어땠을까? 당시 백령도는 성황신을 모셨으며, 게다가 시아버지(최창순)는 섬을 대표하여 선택된 제관으로 매년 정월 13일에 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며느리인 김 여사는 천주교 전교는 커녕 지키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게다가 결혼 후 백령도로 올 당시 시댁은 16~17명이 사는 대가족에 항상 제사가 많았고 제사를 모르던 김 여사는 제사 절차를 몰라 제삿날이면 매우 불안했다. 지역사회와 집안 모두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지만 김 여사는 천주의 뜻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자신의 종교적 신앙심을 두텁게 키웠다.

 

▶백령도에 틔운 천주교 싹

그녀는 민간 신앙의 분위기 속에 어떻게 천주교를 전파했을까? 6·25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6·25 이전에는 중학교 입학 전까지 자녀들의 이름을 '분도', '아가다' 등 세례명으로 부르거나 1949년 조부가 돌아가실 때 시부모는 제사, 이들 부부는 '연도(煉禱)'로 하면서 집안부터 천주교의 바람을 일으켰고, 고향 장연 등지로부터 오는 김 여사의 지인들 즉, 1947년 이호연, 1948년 제부(弟夫)인 정만원의 입도에 의한 신자 증가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함성항 면장(2대)과 김 여사의 친구 김데레사의 결혼은 백령도 유지들이 천주교를 믿는 계기가 됐다.

6·25 이후에는 전쟁으로 인한 군종신부들의 입도가 줄을 이었는데, 1952년 임종국 신부가 처음 들어와 김 여사 사랑방에서 교우 몇 분과 미사를 드린 것이 성직자와 함께한 백령도의 첫 미사다. 이어서 미 군종신부, 김창석 신부, 노기남 대주교, 윤을수 신부가 연차적으로 방문하여 천주교 발전의 토대를 쌓을 때도 늘 함께 했다. 뒤이어 부영발 신부가 천주교의 꽃을 피웠던 것은 김 여사의 두터운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지역의 분위기 조성과 헌신적 노력이 있었음을 빼놓을 수 없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