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친 잃고 길거리 전전하다 쉼터 생활
2019년 7월부터 내국인 평균 건보료
장기 체류 외국인 부과…470만원 체납
국적 문제로 감면 불가능…쫓겨날 판
“혼자서 생활하기 어려운 장애인을 쫓아낸다는 건, 죽으라는 거잖아요.”
한국에서 태어나 한평생 살았던 발달장애 외국인이 자신을 보호해주던 부모를 잃은 불행에 겹쳐 '470만원' 때문에 다른 나라로 쫓겨날 안타까운 처지에 놓였다. 혼자서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이지만, 획일적으로 건강보험료를 부과하는 제도 때문에 위기를 맞았다.
3일 오후 경기도 한 지역에 있는 노후주택(현행 규정상 시설 정보 비공개). 가정폭력 피해 등으로 갈 곳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를 임시 보호하는 쉼터가 자리하고 있다. 왕모(50·여)씨는 2020년 8월 이곳을 찾아왔다.
앞서 2년 동안 왕씨는 다른 지역에서 길거리 노숙과 쉼터 생활을 전전했다. 경찰이 보호가 시급한 대상으로 판단해 쉼터로 데려가기도 했다. 언어와 행동 기능이 미숙한 장애인이고, 폭행 피해도 의심된다. 왕씨는 무슨 사연을 안고 있을까.
쉼터 관계자들이 조사해보니 그는 1973년 4월 충남 온양(현 아산시)에서 태어났다. 대만 국적 이민자인 화교 부부 밑에서 자랐다. 한국에서 쭉 자랐으며, 외국 땅을 한 번도 밟아 본 적 없다. 사실상 '한국 사람'이다. 그러나 왕씨를 돌보던 어머니는 2004년 8월, 아버지는 2018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왕씨는 F-2 비자로 한국에 장기 거주했다.
이런 와중에 최근 쉼터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독촉 고지서다. 2019년 9월부터 올 7월까지 3년간 체납된 건강보험료는 약 470만원. 왕씨는 이 비용을 낼 돈도, 노동으로 벌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의 명의로 된 통장은 잔고가 텅텅 비어있다. 고지서엔 '압류'와 '체류허가심사 제한' 등의 내용이 적혀있다.
앞서 정부는 2019년 7월을 기점으로 6개월 이상 체류 외국인에게 건강보험료를 내도록 제도를 바꿨다. 자산·소득과 상관없이 내국인 평균보험료를 부과한다. 왕씨는 연체금 약 30만원도 밀렸다. 건강보험료를 안 낸 외국인은 체류 연장에 각종 불이익이 따른다.
쉼터 관계자들은 즉시 방법을 찾고 나섰다. 우선,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찾아가 '감면 신청'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불가능'이다. 왕씨가 한국인 국적을 갖고 있지 않아서다.
이어 '장애인 등록'을 추진했다. 왕씨는 지난 4월 아주대학교 병원에서 진행한 심리평가 결과, 전체 지능(IQ)이 49점으로 '매우 낮음'으로 나왔다. 또 사회연령 5.9세로 장애판정 기준에 해당한다는 의사 소견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도 국적과 건강보험료 체납 이력이 발목 잡는다.
국적 취득은 시험평가와 면접을 치러야 하는데, 글도 못 읽는 왕씨에게 넘기 힘든 벽이다. 이래저래 상황이 꼬인 셈이다. 왕씨처럼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위한 별도 대책이 요구된다.
이날 쉼터에서 만난 관계자는 “여러 사정 때문에 국적을 얻지 못했을 뿐이지, 대한민국 국민과 마찬가지다. 쫓아내거나 도와주지 않으면 죽으라는 것”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왕씨는 “국민학교를 다니다 관뒀고, 아버지 따라 중국집에서 설거지 일을 도왔으나, 갑자기 돌아가셔서 생활하기 어려웠다”며 “쉼터에서 계속 지내고 싶다. 노숙인이 다시 되기 싫다”고 호소했다.
/김현우 기자 kimhw@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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