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나를 밝히는 것이 '경'이고(內明者敬)
밖으로 일을 판단하는 것이 '의'이다(外斷者義).

누군들 아름다운 세상을 쓰고 싶지 않으랴. 아니 쓸 수 없는 현실이기에 쓰는 글줄마다 참 곤욕스럽다. ¨“내가 대통령실에 추천한 뒤 장제원 의원한테 물어보니 대통령실에 안 넣었다길래 내가 좀 뭐라고 했다”며 “7급에 넣어줄 줄 알았는데 9급에 넣었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최저임금보다 10만 원 정도 더 받는데 내가 미안했다. 강릉 촌놈이 최저임금 받고 서울에서 어떻게 사나”라고 덧붙였다.〃 한 신문 기사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다. 백성이 양도한 권력으로 그 자리 있는 자가 어떻게 저리도 무례를 넘어 천박하게 말할까. 이 한 줄 기사만으로도 2022년 7월, 대한민국의 현실을 알만하다. 권력을 쥔 자들의 국정농단 행태가 연일 보도되니 공도(公道, 공평하고 올바른 도리)는 없어지고 사문(私門, 사적인 탐욕의 문)만이 활짝 열렸다. '깜냥'이 안 되는 이들이 득세하여 부조리한 권력의 계보학을 정립하고 통수권자는 '암군(暗君,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통치자)'으로서 그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다. 취임 불과 2개월 만에 대통령의 지지도는 이제 30%마저 위협받고 있다.

정치는 한 나라의 근간이다. 정치권력은 한 나라 역사의 물줄기를 틀어쥔 자들이기에 그렇다. 이 근간이 저러니 현재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고통이고 미래는 암울하다. 선악의 구분도, 옳고 그름도, 정의와 부조리도 뒤엉킨 세상이 되어버렸다. ¨한국 전 세계 꼴찌 198위…합계 출산율 1.1명〃이라는 기사는 현재의 참담함과 미래의 절망을 그대로 말해준다.

마치 역사 속, 저 명종 임금 시절이 다시 온 듯하다. 12살인 명종이 즉위하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세상은 혼돈 속으로 떨어졌다. 윤원로와 윤원형 형제는 누이 문정왕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다. 불교에 심취한 문정왕후는 유교의 나라를 불교 왕국으로 바꾸려 전횡을 일삼았다. 윤원형은 형 윤원로를 죽이고 정난정과 사랑과 권력 놀음에 대취(大醉)하였다. 역사는 이 시절을 “시랑당도지의(豺狼當道之意, 승냥이 이리 무리가 잡은 정권)”라 하였다.

이런 명종 10년인 1555년 11월 19일, 새로 제수된 단성 현감을 사직하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의 상소가 올라왔다. 선생은 강개하고 정직하였으며 세상에 부합하지 않고 몸을 깨끗하게 가진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생을 마칠 때까지 나라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단 한 번도 벼슬에 응하지도 않았다. 선생은 내명자경(內明者敬,안으로 나를 밝히는 '경')과 외단자의(外斷者義,밖으로 일을 올바로 판단하는 '의')를 새긴 경의검(敬義劍)으로 무장하고 쇠방울인 '성성자(惺惺子)'를 차고 다닌 깨어있는 지식인이었다. 경(敬)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면, 의(義)로써 일을 반듯하게 해서였다. 저 남명 선생의 말을 들어 이 시절을 읽어본다.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하늘 뜻이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백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란 자들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

선생은 초야의 일개 선비였다. 그런데 '국사이비(國事已非, 나랏일이 이미 잘못되어), 방본이망(邦本已亡,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였고), 천의이거(天意已去, 하늘의 뜻이 이미 떠나갔으니), 인심이이(人心已離, 인심도 이미 떠나버렸다)'라 일갈한다. 목숨쯤 내놓고 쓴 어휘들이다.

다음 구절은 더욱 등골을 서늘케 한다. “자전(慈殿, 임금의 어머니)께서는 생각이 깊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임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전은 문정왕후이다. 그 절대적 세력가를 '궁중의 한 과부에 불과(不過深宮之一寡婦)'라 하고 명종 임금을 '다만 선왕의 한 외로운 후임자(只是先王之一孤嗣)'라 내쳤다. 선생은 이런 자들의 세상이기에 자신이 벼슬길에 나간들 “위로는 위태로움을 만에 하나라도 지탱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털끝만큼도 보호하지 못하니 전하의 신하 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라 반문한다.

심한 모욕을 느낀 명종은 욕언(辱言, 욕된 말)이라 분노하였지만 사실이고 보니 그뿐이었다. 실상 명종 시절 20년간 조선은 국가적으로 단 일보도 나아가지 못했다. 병작반수제, 공납과 방납의 폐단, 환곡제의 고리대금화 등 백성의 삶은 피폐했고 민심은 요동쳤다. 급기야 '모이면 도적이고, 흩어지면 백성'이라며 임꺽정의 난까지 일어났다. 사후적인 규정이기는 하나 ‥명종실록…은 이 모든 것이 단 넉 자, '왕정지실(王政之失, 왕이 정치를 잘못해서)'이라고 적어놓았다. 이 시절에 되읽어 본 저 시절 역사, 나만의 기시감(旣視感)일까. 남명 선생의 '경의'와 '성성자'만 주섬주섬 챙겨볼 뿐이다. 2022년 대한민국 역사의 물줄기는 지금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