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석 언론인.<br>
▲ 신용석 언론인.

1953년 6월26일부터 16일 동안 한국의 신문 1면 머리 기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 정부의 특사로 서울에 온 로버트슨 차관보와의 회담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국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으로 백악관의 주인이 된 아이젠하워는 델레스 국무장관과 함께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인 로버트슨을 국무부 극동 담당으로 발탁했다. 소강국면의 소모전으로 치닫고 있던 한국전쟁을 조속히 끝내기 위해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휴전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미국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사태는 그 해 6월18일에 이 대통령이 단행한 2만7천여명에 달하는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전세계가 놀란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과의 협상을 염두에 둔 고도의 정치적 결단이었다. 이보다 앞서 미 군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에버레디 작전을 수립했다. 에버레디 작전 실행 직전 고위급 대책회의에서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한국 정부를 접수합니까? 우리 자신을 침략자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라면서 작전 계획을 포기하고 이 박사를 지원한 사람이 로버트슨 차관보였다.

▶로버트슨 사절단 일행은 서울에 도착한 즉시 “한미 양국의 목적은 동일하며 이를 위한 효과적이고 영속적인 수단을 조정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이 대통령과의 회담은 첫 날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북진통일 없이는 휴전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단호한 태도에 조속히 휴전을 하려는 미국 대표단과의 협상이 순조로울 수는 없었다. 16일 동안의 밀고 당기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로버트슨 차관보는 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를 통해 ①이 대통령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지략이 있다. ②한국을 철저한 반공국가로 각성시켰다. ③그의 정신과 용기는 보호되어야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16일간의 긴박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협상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포로들의 자유 귀환을 보장하며 정치·경제·국방 정책의 협력과 한국의 자유·독립·통일 실현을 위한 공동 노력을 한국과 미국이 약속한다는 성명을 서울과 워싱턴에서 발표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 후 7월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고 10월1일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정식으로 서명되었다.

▶이 같은 긴박한 한국전쟁의 막바지에서 월터 로버트슨 차관보의 신념과 판단 그리고 설득력과 의지가 없었다면 한미동맹의 실현과 오늘의 대한민국이 불가했다는 것은 필자의 신념이 되었다. 로버트슨을 깊이 연구하고 기념하기 위한 그 동안 필자의 노력에 언론계 선배 남시욱 박사는 <한미동맹의 탄생비화>라는 역작의 집필로 화답해 주시면서 “본인이 이 책자를 시도하도록 영감을 주었다”며 필자를 성원해 주었다. 그 동안의 로버트슨 연구와 앞으로의 기념사업에도 뜻있는 분들의 관심과 성원이 기대되는 시점이다.

/신용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