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야마 미도리의 <걸크러시>. K-POP 아이돌을 목표로 하는 일본 소녀들을 그린 일본만화다.

애플TV가 내어놓은 OTT 드라마 <파친코>가 공개 직후부터 화제다. 영상의 완성도와 기용된 배우들의 면면, 우리 돈 1천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까지 어느 하나 얘깃거리 아닌 게 없을 정도다.

주목할 점은 이 작품이 우리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고 배우들도 한국인 또는 한인 교포들이지만 막상 자본과 제작진의 국적은 한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2020년의 화제작 <미나리>에 이은 한인 디아스포라 연대기인 <파친코>를 두고 일부가 습관처럼 K-드라마라 부르는 건 어폐가 있다. 그러나 <파친코>는 이제 '한국'이라는 소재가 더 이상 '한국 국적을 지닌 사람들'과 '한국 자본'의 독점 재산이 아니라는 점을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자본 규모로 깨닫게 해 주었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래도록 유난히 신경 써 온 건 우리 바깥에서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였다.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온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과 같은 비 실사 기반 시각문화 쪽은 이러한 경향이 한층 더했다. 한국 오덕들은 작품들에 한국인 캐릭터가 나오길 바라면서도 작품 속에 등장한 한국인들이 굳이 콕 집어 범죄자로 나오면 짜증을 느껴야 했고, '일본인' 설정인 미소녀 캐릭터에 한복을 입힌 한국어판 굿즈가 보이면 거 어쩔 수 없네란 심정으로 지갑을 열곤 했다.

심지어 한국인 작가들이 해외 매체에 '한국적 소재를 이용한 일본 만화'를 연재하는 모습에 일부는 '한국만화의 세계 진출'이라고 억지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존감을 채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게 비단 오덕들의 감정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우리 대중문화사 전체에 걸쳐 깔려 있던 정서다.

우리는 남이 우리를 어찌 보고 있나를 오래도록 신경 써 왔다. 이는 우리의 낮은 문화적 체급을 자각하고 있던 이들이 안고 있던 일종의 강박이었다. 하지만 BTS가 보여준 성과나 웹툰의 폭발적 성장세가 보여주듯 한국 대중문화의 체급은 객관적으로 봐도 이제 싸이 때의 '밈적 유행'을 훌쩍 넘어서 있는 상태다. <파친코>라는 작품이 지금 바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문화적 체급 향상과 무관하지 않다. 정치가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한국의 여러 면면은 이제 <미나리>와 <파친코>의 디아스포라 스토리를 넘어 좀 더 다양한 장르에서 '힙'한 소재로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비 실사 기반 시각문화로도 이 흐름은 고스란히 연결될 것이고, 그게 반드시 우리 손에서만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일본 작가 손으로 K-POP 아이돌이 되려고 한국으로 향하는 소녀들을 소재로 삼은 <걸크러시>, 그리고 K-POP 아이돌에 빠진 야쿠자를 소재로 한 <야쿠자의 덕질> 같은 만화가 등장한 바 있다. 일본인이 한국을 소재로 한 만화를 그렸다고 감읍할 필요야 없지만 전에 없던 흐름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제 이전과는 다른 시대를 만나고 있고, 또한 콤플렉스에 더 이상 갇혀 있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어찌 하느냐에 따라 세계인이 K-POP만이 아닌 우리 역사와 보편적 문화 전반을 매력적으로 덕질하게 만들 수 있는 때가, 이제는 왔다.

/서찬휘 만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