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누나스에서 만난 사람들.

앙헬레스, 내가 이곳에 정착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살갗을 찢는 뙤약볕과 도로를 달리는 지프니, 지프니가 뿜어내는 배기가스. 다운타운가 인파 속을 걷고 있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둠이 내리면 유흥가인 워킹스트릿이 화려한 불빛을 발하며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앙헬레스는 루손섬에 속한 주(州)인 팜팡가(Pampanga)에 위치한 곳으로 인구가 31만5000명에 불과한 조그마한 도시다. 과거에 미군 클라크 공군 기지가 있었지만 1991년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하면서 미군은 황급히 철수하고 기지는 폐쇄되었다. 세계 어디에나 미군이 주둔하면 그 주변은 미군을 상대로 하는 유흥지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새 앙헬레스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유흥도시라는 낙인이 찍혔다.

앙헬레스는 20여년 전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마닐라에서 바기오로 가는 여정에서 그냥 지나쳐가는 도시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2003년 인천∼클라크필드 간 노선에 아시아나항공이 취항하면서 한국인 정착민도 늘어나게 되었다. 나와 앙헬레스의 인연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앙헬레스를 두 달간 여행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렇게 열두해가 훌쩍 지났다.

나는 아누나스 행복한우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선교사이다. 교회가 있는 '아누나스'라는 동네는 필리핀 행정단위로 가장 작은 구역인 '바랑가이'에 해당한다. 바랑가이는 우리나라도 치면 동이나 리에 해당한다. 아누나스는 꿈과 욕망, 가난과 절망이 공존한다. 천개의 얼굴을 가진 동네라 할 수 있다. 프랜쉽이라고 불리는 한인타운이 있고 화산재가 뒤덮인 저지대와 강, 아누나스 다리 건너 주택단지인 빌리지들이 나온다. 프랜쉽은 삼겹살집, 미용실, 노래방, 주점 등 우리나라 먹자골목과 비슷하다. 아누나스 다리를 사이에 두고 클라크공항 지역의 미국 문화와 프랜쉽의 한국 문화가 공존한다. 그리고 그 아누나스 다리 밑에 빈민들이 살고 있다.

앙헬레스는 외국인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상대로 한 일자리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필리핀 전역에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흘러들어온다. 이들은 돈도 없이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라 우리나라로 치면 달동네 판자촌이라 할 수 있는 아누나스로 몰려들어 정착하기 시작했다. 아누나스는 마약과 강력 범죄 등 불법이 성행하는 곳이다. 그래서 앙헬레스에서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나면 모두 아누나스를 주목한다. 그늘에 누워 약에 취한 어른들, 학교도 못 가는 아이들을 골목 모퉁이든 어디에서든 흔히 마주친다.

내가 이곳에 들어가 선교를 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뜯어말렸다. 가족들도 반대했다.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얼씬하기를 꺼리는 곳에 정착하려는 나를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곳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이정은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선교사.필리핀 아누나스 행복한우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