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꾸물꾸물 문화학교 대표 윤종필 작가가 '까치 호랑이'라는 작품명의 판화를 찍어 주변 지인 여럿에게 신년 연하장으로 보낸 소식을 접했다. 휴대전화 문자나 톡 문자로 신년 인사를 보내는 요즘 세태와 달리 정성이 담긴 작품으로 연하장을 보낸 일은 정감이 넘치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작가의 '까치 호랑이' 연하장을 받은 사람들도 보낸 이의 정성에 적잖이 감동한 모양이다.

윤종필 작가의 '까치 호랑이' 연하장은 임인년을 나타내는 호랑이와 소나무, 까치 두 마리가 날갯짓하는 모습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미술사적으로 보면 전형적인 조선 민화풍 작품이다. 조용진 전 서울교대 미술과 교수에 따르면, 민화와 동양화를 뚜렷하게 구별하려면 기운생동(氣運生動), 골법용필(骨法用筆), 응물상형(應物象形), 수류부채(隨類賦彩), 경영위치(經營位置), 전이모사(傳移模寫)라는 화육법(畵六法) 즉, 여섯 가지 정통 동양화 기법을 따져야 한다. 하지만 굳이 화육법으로 보지 않더라도 화면 전체의 구도를 무시하고 개개의 사물을 중심으로 나열하며, 원근법을 고려하지 않는 역원근법이 특징인 민화의 양식만으로도 쉽게 민화인지 알아볼 수 있다. 윤종필 작가의 '까치 호랑이'도 민화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새해 정월이 되면 호랑이와 소나무, 까치가 등장하는 민화, 즉 '까치 호랑이' 그림을 집에 걸곤 했다. 지금도 그 풍습은 드물지만,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여기서 잠깐, 그림을 더 깊이 감상하려면, 그림에 담긴 뜻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흔히 미술작품을 감상한다고 하는데, 동양화나 민화 등 우리나라 전통화는 감상한다고 하지 않고 '그림을 읽는다'고 한다. 그림에 담긴 뜻이 있기 때문이다. 윤 작가의 '까치 호랑이'도 마찬가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까치 호랑이' 그림은 신년보희(新年報喜)이다. 새해에는 기쁜 소식만이 있으리라는 뜻이다. 까치는 기쁨(喜)을, 소나무는 1월(신년)을 뜻한다. 흔히 우리 선조들은 사나운 호랑이 그림을 붙여 액막이하려 했다. 그런데 민화에 등장하는 호랑이가 액막이의 뜻을 지녔다는 건 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호랑이와 표범을 구분하지 못해 호랑이로 뭉뚱그려 인식했다. 표범의 표(豹)는 알리다라는 뜻의 보(報)와 중국 발음 'Pao'로 같다. 소나무는 솔 섶나무를 뜻하는 신(薪)으로 신년(新年)으로 대체된다. 그러니 윤종필 작가의 '까치 호랑이'에 그려진 소나무(新年), 호랑이(報), 까치(喜)는 신년보희(新年報喜) 즉 '새해에는 기쁜 소식만이 있으리라'로 읽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종필 작가는 '까치 호랑이' 연하장에 왜 까치를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씩이나 그렸을까? 기쁨을 두 배로 받으라는 소리인가? 물론 그런 뜻이 없지 않을 것이다. 두 배의 기쁨을 뜻하는, 희(喜)자가 나란히 두 개가 붙은 쌍희 희(囍)자가 있다. 이 글자는 중국 진나라 시황제가 아방궁을 지으면서 기쁨이 넘쳐나라고 만든 글자이다. 시황제야 초호화 궁전 아방궁에서 기쁨과 환락이 두 배 세 배 넘치기를 바랐겠지만, 우리 조상들이 까치 두 마리를 그린 뜻은 따로 있다.

까치 두 마리는 기쁨을 혼자만 독차지하지 말고 '기쁨을 함께 나누자(同喜)'라는 의미이다. 지역 사회의 여럿이 윤종필 작가의 '까치 호랑이' 연하장에 주목하는 이유도 그런 속뜻 때문일 테다.

지난 두 해 동안 우리 사회는 코로나19로 기쁨보다는 고난이 더 많았다. 무엇보다도 서민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사회적 약자와 저소득층이 일상에서 겪어야 할 고통은 누구보다 컸다. 중상위층과 하위층의 교육 격차도 더 벌어졌다. 우리 사회 전반에서 소득불평등 등 삶에 놓인 양극화 간극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깊어만 가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를 앞두고 후보자와 정치 집단마다 자기 혼자 기쁨과 권력을 독차지하려고 기를 쓰고 있다. 아무래도 '까치 두 마리'에 담긴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듯싶다.

 

/조혁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