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인천사람·기독교인 121명
제물포항서 일본 배로 나가사키행
19명 빼고 요코하마 거쳐 하와이로
10일 여정 끝 해 넘겨 총 89명 입국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새로운 삶
▲ 120년 전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민자를 실어 날랐던 갤릭호와 이민자들이 지나온 항구도시들. /사진제공=한국사이민사박물관

국운은 기울었다. 더 이상 나라는 국민을 품지 못한다.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막연한 기대, 삶에 대한 애착. 그 모든 것이 얽히고설켜 대한민국 이민이 첫발을 내디뎠다. 120년 전 이맘때, 날은 매서웠다. 칼바람을 맞고 일본을 거쳐 하와이에 도착한 121명. 일본과 하와이에서 신체검사로 탈락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 이민이 시작됐다.

▲ 구한말 당시 인천 제물포 부두 모습./사진제공=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구한말 당시 인천 제물포 부두 모습./사진제공=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민을 내몬 국가

포와(布哇). 우리 역사에 언급되지 않은 미지의 땅 하와이. 이곳으로 첫 이민이 시작됐다.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 세계는 어지러웠다. 값싼 노동자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하와이 왕국은 1896년 대한제국을 통해 노동자를 데려오기로 했다. 1899년과 1901년 홍수와 기근에 대한제국은 몸살을 앓았다. 당시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쌀과 곡물의 반출은 심각했다. 나라는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때 주미공사 알렌(H. N. Allen)과 미국인 사업가 데쉴러(D. W. Dechler)가 고종황제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나라 경제사정이 안 좋으니 이민을 보냅시다. 그리고 이민자 여권을 만들면 황실 재정에도 도움이 됩니다.”

1902년 11월17일, 민영환이 초대 총재로 취임한 한국인 여권 발급 업무를 맡은 유민원(綏民院)이 세워졌다. 하와이 이민자 모집도 시작됐다. 이민자 모집은 현 내리교회 담당 목사인 존스(G. H. Jones)의 역할이 컸다. 서구 신문물에 대한 폭넓은 전파에 당시 기독교인과 인천사람은 이민에 참여했다. 그렇게 121명이 모였다.

 

▲디아스포라

121명이 유민원에서 집조(執照)라 불린 여권을 받았다.

1903년 8월23일 발급된 실물 집조가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있다. 하와이 이민자 고영휴(高永休)의 집조이다. 전라도 제주군 성내면 1동 출신인 49세 고영휴는 농업을 목적으로 이민을 떠나기 위해 여권을 발급받았다. 고씨의 집조 발급번호는 796, 여행보증인은 인천 우각동 상인 이여삼(李汝三)이다. 이민 경비를 사탕수수 농장이 선지급한 만큼 보증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씨는 도릭호(Doric)를 타고 하와이로 갔다.

이민자 합숙소가 세워졌다. 동서개발회사가 설립한 이민모집자합숙소는 내동에 있었다.

첫 이민자 121명은 인천 제물포항에서 겐카이마루(현해환 玄海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서 갤릭호를 타고 미국 하와이로 향했다. 제물포에서 하와이까지 바로 가는 선편이 없었기에 이들은 미국 상선을 타기 위해 일본의 나가사키항을 경유해야만 했다.

이들 중 나가사키에서 실시된 신체검사에서 탈락한 19명을 제외한 102명의 국내 거주지 분포를 보면 제물포 67명, 부평 10명, 강화(교동 포함) 9명, 서울 7명, 경기도 3명, 그 외 지역 6명이다. 인천사람이 84%(86명)나 된다.

▲ 갤릭호를 탄 이경도의 대한제국 개인 여권(1903)./사진제공=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갤릭호를 탄 이경도의 대한제국 개인 여권(1903)./사진제공=한국사데이터베이스

▲지옥 같은 하와이 바닷길

“거대한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밀어젖힐 때마다 흘수선 아래의 화물칸에 수용된 조선인들은 예의와 범절, 삼강과 오륜을 잊고 서로 엉켜버렸다. 남자와 여자가, 양반과 천민이 한구석으로 밀려가 서로의 몸을 맞대고 민망한 장면을 연출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요강이 엎어지거나 깨지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토사물과 오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욕설과 한탄, 비난과 주먹다짐이 일상사였고 고약한 냄새들은 가시지 않았다.”

소설가 김영하의 '검은꽃'의 한 구절이다. 하와이 이민을 지나 멕시코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탄 배의 풍경을 묘사한 내용이다. 아비규환을 넘어 지옥도를 경험한 것 같은 그들의 이민 여정은 눈물났다. 유민원 민영환 총재를 비롯해 이민자 가족 등이 잔교에 모여 이민자 121명을 배웅했다. “돈 벌어 오겠다.” 그들의 다짐은 미지의 여정을 떠날 힘이 됐다.

1902년 12월24일 나가사키에 도착한 겐카이마루에서 하선한 121명 중 신체검사에서 탈락한 19명을 뺀 102명은 상하이↔나가사키↔요코하마↔호놀룰루를 연결하는 미국 서·동양기선주식회사 소속의 갤릭호(S.S. Gaelic)를 타고 요코하마항을 경유해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이르는 10일간의 여정에 오르게 됐다. 그리고 이 배는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다시 신체검사 13명이 탈락해 최종 89명이 하와이 입국에 성공했다. 121명에서 1차 19명, 2차 13명이 떨어졌다.

이들은 하와이 오아후 섬 아이알루아농장 모쿨레이라 사탕수수농장에서 이민 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렇게 64회에 걸쳐 7415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왔다.

 


 

전쟁영웅 조지 리, 갤릭호에 몸 실었던 이응호였다

▲ 인천사람 이응호는 120년 전 제물포항에서 이민선 갤릭호에 탔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에 대한 기록이 1918년 12월18일자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Stockon Daily Record)’에 자세히 보도됐다. /사진제공=UC리버사이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 인천사람 이응호는 120년 전 제물포항에서 이민선 갤릭호에 탔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에 대한 기록이 1918년 12월18일자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Stockon Daily Record)’에 자세히 보도됐다. /사진제공=UC리버사이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조지 리(George Lee)는 1896년 제물포 출신으로 정확한 생일은 본인이 기억하지 못한다.”

1917년 6월5일 작성된 '미 육군 징집대상자 등록카드'에 적힌 이응호의 기록이다. 한국인 최초 비행사, 이응호.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제물포에서 떠난 하와이 이민 1세대인 것은 확실하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이응호와 그의 아버지인 이원형이 갤릭호를 탔던 기록을 확인했다.

<1920, 대한민국 하늘을 날다>의 저자 재미언론인 한우성과 리버사이트 캘리포니아 주립대 장태한 교수는 이응호 발굴에 나섰다. 그 책을 통해 이응호의 행적을 살필 수 있다.

이응호는 1896년 제물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원형(이두형으로 개명)은 도산 안창호와 가까운 사이였고, 교민 단체를 통해 고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도산 선생에게 “편도여비를 드리겠다. 마차로 마중 나가겠다”는 편지를,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마음속으로나마 만세삼창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응호가 18세가 되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미국 모병관을 찾아 입대 의사를 밝혔지만 유색인종 차별 탓에 수차례 거절 끝에 미국 참전 결정에 따라 겨우 입대했다. 당시 1917년, 그가 훈련받은 곳이 미국 육군 항공대였다. 1918년 항공학교를 마친 후 1차 대전에 참전해 유럽 전선에서 총 156회의 출격을 무사고로 마치고 전역했다.

<1920, 대한민국 하늘을 날다>에 따르면 미국 신문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Stockon Daily Record)> 1918년 12월18일자에는 '조지 리, 명예와 신부를 얻다'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조지 리는 21세 한국인으로 미국이 1차 대전 참전한 직후 만테카(캘리포니아 북부 소도시)에서 미군 항공대에 들어갔으며 지금은 명예제대해 집으로 돌아왔다. (중략) 그는 전장에서 돌아온 후 뉴욕에 사는 한 젊은 여성과 결혼했다. 장인이 경영하는 고무 사업을 함께할 계획이다.” 그는 뉴욕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고, 미국인 부인과 아들 1명을 낳았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뉴욕 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민사 120년 맞아 출발지 인천서 연이은 기념행사

▲ 2021년 12월20일 인천 중구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열린 '인천시-재외동포재단, 한국 이민사 120주년 기념사업 공동협력 업무협약식'을 마친 뒤 김성곤(오른쪽부터) 재외동포재단 이사장과 박남춘 인천시장이 김상열 관장으로부터 '남미의 한인들' 전시 내용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인천시
▲ 2021년 12월20일 인천 중구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열린 '인천시-재외동포재단, 한국 이민사 120주년 기념사업 공동협력 업무협약식'을 마친 뒤 김성곤(오른쪽부터) 재외동포재단 이사장과 박남춘 인천시장이 김상열 관장으로부터 '남미의 한인들' 전시 내용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인천시

이민의 시작 인천, 2022년 한국 이민사 120년을 맞아 인천에서는 연중 기념행사를 연다.

시는 오는 10월 '한민족 이민사 120년 기념행사'와 올해 말 하와이에서 관련 행사를 갖는다.

이에 10월 중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서 열 '사진으로 보는 디아스포라 120년'과, 7월부터 아트플랫폼에서 개최될 '디아스포라 릴레이 작가전', 11월 트라이보울의 '디아스포라 120주년 학술도서 발간 및 토크콘서트', 10월 중 시청 앞 광장에서의 '세계도시거리이정표' 등이다.

시는 지난해 12월20일 재외동포재단과 '한민족 이민사 120주년 기념사업 상호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재외동포재단은 올해 '세계한인회장대회'와 '코리안페스티벌'을 인천에서 연다.

'세계한인회장대회'는 법정기념일인 10월5일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에 맞춰 열리는 행사로 전 세계 한인회장 및 대륙별 한인회연합회 임원(약 74개국 400여명)이 재단 초청으로 참석해 모국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한인회 간 상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자리다. '코리안페스티벌'은 재외동포들이 참여하는 문화 프로그램이다.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하는 이들 2개 행사는 지방에서 개최한 사례가 없다.

오는 12월 3억원을 들여 하와이에서 개최될 '하와이 이민 120주년 기념사'에는 시립무용단이 함께한다.

인천에서 하와이 이민을 떠난 국민은 2년간 7500여명에 달한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그들 이민자는 1910년 조국이 주권을 상실했을 때는 항일독립운동을 지원하며 특유의 성실함과 교육열은 갖고 현지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자랑스러운 한인사회를 구성했다”고 말했고, 서상호 시 문화예술과장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750만 재외동포들이 인천을 통해 모국을 방문하고 인천을 통해 거주국으로 돌아가는 이민의 역사를 함께해 온 도시이다. 이민 1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인천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계획했다”고 말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