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인천 주안생

1965=주안초등, 동인천중, 동산고    홍익대 공예과 졸업

1968=홍익대 강사, 동산고 교사

1973=홍대 대학원 공예도안과 졸   업. 한국 현대도예가 초대전   (서울대 박물관)

1975=광복 30주년기념 현대공예대   전(국립현대미술관)

1977=한국 미술가협회전 공예부    금상

1982~1994=한국 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85~1998=한국 현대공예대전 초   대작가 심사위원

1993=한국 현대도예전(미국)

1997=서울 국제도예비엔날레(서   울시립미술관)

1998=경덕진 도자대학 초청 한ㆍ중    도자교류전(중국 경덕진 도   자대학)

현재=이부웅 도예연구소 운영(인천 계양구 귤현동), 단국대학교 도예학과 교수, 단국대 도예연구소 소장, 한국 도작가회, 한국 도예가회, 경인 도예가회 회원 "보는 도자기" 에서 "쓰는 도자기"로

소외된 도자예술 대중 품에

우리 민족사에서 뛰어난 예술성과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야는 공예, 그 중에서도 도자예술을 꼽을 수 있다. 그 가운데 고려의 순청자와 상감청자,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류등은 동시대 주변의 어떤 나라의 그것들보다도 뛰어난 예술성과 실용성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것들은 공예라는 이름보다 고미술품이라는 미명으로 박물관 진열장이나 수장고에 들어가 있어 그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가치로 대접받고 있다. 그것은 생활품으로써 공예의 생을 마감하고 고미술품으로 새로운 가치창조의 새 생명을 부여받은 것에 다름 아니다.

 아울러 이는 쓰는 도자기에서 보는 도자기로 역할이 바뀐 바, 자고로 미술품이라는 것은 회화와 조각처럼 작가의 손을 떠나면서부터 예술품으로 대접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공예나 생활용품처럼 시간의 경과라는 통과의례를 거친후 비로소 미술품으로 대접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공예가들은 공예의 이러한 특성을 망각한 채 쓰는 생활용품으로 보다는 보는 예술품 생산에 급급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부웅(李富雄·57)교수는 우리나라 현대도자의 이러한 실상을 인식하고 일찍부터 기능적이고 값싸며 쓸모있는 도자기의 제작에 노력해 온 분이다. 말하자면 현대도자의 지나친 예술지상주의와 부르조아 취향에서 탈피하여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도자기 생산에 온힘을 기울여 온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도자의 다양한 방법들을 소화하고 그 중심에 있는 도예가로서 이부웅선생의 업적은 출중하다. 이미 60년대 후반 홍대 공예과 및 대학원에서 현대도자의 방법론들을 지도했으며 1974년 단국대학교에 부임해서는 교내에 도예연구소를 만들어 현대미술의 한 영역으로서 도자예술의 질적 고양에 노력해 왔고 우리 고래의 녹청자 유약이나, 독특한 유약을 개발하여 우리의 현대도자를 더욱 풍부하고 세련되게 만들도록 이끌어 왔다. 1976년 계간미술 창간호에 「도예계를 이끄는 11人」이라는 기사가 눈길을 끄는데 이중 최연소작가로 이부웅교수가 들어 있다.

 『작품경향은 그의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의 논문인 눈박이 백자의 기호에 따라 순박한 민속공예로서의 도자기를 추구하고 있다. 도자기가 지니고 있는 도예냄새와 인공적인 기술을 지양하는 도공들의 자연스러운 솜씨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때에도 그는 우리 전통도자기의 기법을 소화하고 새로운 현대적 감각의 실용적이면서도 대중과 괴리되지 않은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이무렵 「한국 미술협회전」 공예부 금상을 수상하는가 하면(1977), 「한국현대도예전(국립현대미술관ㆍ1978)」, 「한국 도예의 단면전(뉴욕ㆍ1982)」 등에 초대 출품함으로써 한국 현대 도자계의 선두주자로 우뚝 서게 된다. 또한 서울신문사 도예 공모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한국현대공예대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꾸준히 참여하여 상대적으로 주변적 위치에 있는 도자예술을 미술 본래의 역할을 고수하면서도 올바른 이념을 정립하고 전통을 계승할 수 있는 공예 본연의 임무를 지키도록 방향을 제시해 온 것이다.

 이부웅교수는 1942년 인천 주안에서 도자기공장에 고령토를 납품하던 이오복(李五福)선생의 6남매중 넷째로 태어났다. 주안초등학교와 동인천중, 동산고를 거쳐 홍익대 공예과에서 도예를 공부하게 되는데, 대학에서의 도예전공은 그때만하더라도 매우 드문 경우였다. 대학 재학중에는 동산고등학교에 가마를 만들어 도자기를 굽는 한편, 이 학교 미술과 강사로 후학을 지도하기도 한다.

 이어 동산고 미술교사로 잠시 재직하던 그는 단국대에 부임하면서 후진양성에 주력한다. 특히 그는 단국대에 도예연구소를 만들어 현재 인천 미술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걸출한 도예가들을 양성해 낸다. 김영문(관동대 교수), 임진호(강남대 교수), 오세완(단국대 도예 연구소)씨 등이 그들이다.

 이부웅교수는 얼마전 현대 아트갤러리에서 세번째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이 전시회 서문에서 미술사가 최건씨는 이교수의 작품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리한 눈으로 전체의 비례와 각 부분의 변형을 읽어낸다면 선생이 담아좋은 「節用美」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얻게 될 것이다.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조형미란 말이다. 물론 각 부분의 형태 어느 곳에도 지나치게 과장된 선이나 복잡한 장식 없이 꼭 필요한 것만 갖추려는 「절용」의 결과는 한편으로는 평이함과 단순함을 피할수 없다. 더구나 한국도예의 대세가 변화와 충격을 되풀이하고 있는 최근 이십여년간의 난감한 실정에서 볼 때 이러한 경향으로 전개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도예에서 「절용」이라는 개념은 한 차원 높은 고품위의 개념으로써, 회화의 경우 消去라는 개념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절용」의 원칙은 태토를 선별하거나 마무리하는 기술적 완성도에서도 읽을 수 있고 기형을 약간 변형시키는 과정과 표면에 백토분장하는 결과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부웅교수는 현재 인천시 계양구 귤현동의 한 야산에 이부웅 도예 연구소를 짓고 후학들과 함께 매일 이곳에서 작업을 하고 또한 기형이나 태토 유약 등을 연구한다.

 얼마전 필자는 이종구화백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는데 대담중에 이교수는 우리의 현대공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진단과 처방을 했다.

 『우리의 도자예술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중으로부터 소외되고 미술로부터도 소외된 이중의 소외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전통공예의 방법론을 현대 공예의 그것에 활용하는 의식이 단절되고 각각 자폐적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현대도자 이론의 부재현상과 제작태도의 안일함은 이러한 자폐적 에너지를 부추겨 왔습니다. 이러다 보니 도예가들이 조각가처럼 도자 조소(Ceramic Sculpture)를 만들고 있으나 조각가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도자예술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도자예술 본연의 역할로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돈많은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왔던 작업경향에서 탈피하여 민중속으로 파고 들어갈수 있는 편리하고 값싼 도자기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도자가 자생적 기반을 갖고 발전해 나갈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 것입니다.』

〈이경모·미술평론가〉

일관된 특징은 익숙한 성형에 뒤따르는 강한 힘과 양감이다. 그러나 유약의 흐름자국과 백토의 거친 붓자국이 이 힘을 안정시켜 그릇 안으로 끌어 넣는 한편, 흐름자국의 유연성과 붓자국의 빠른 속도감은 「절용」이 주는 단단하고 통제된 듯한 느낌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