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평화재단경인본부, 강화서 초청강연회 및 탐방행사 개최
▲ 이시우 작가가 ‘사진으로 보는 서해평화’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상임대표·김의중)는 지난 27일 강화도 일원에서 통일운동가 이시우 사진작가를 초청, ‘사진으로 보는 서해평화 강연회 및 평화 탐방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강화지역 언론사인 ‘강화뉴스’에서 이 작가의 강연을 진행한 뒤, 강화중앙교회, 강화대교 주변 난장터, 길상면 온수리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위령지 등을 돌아보는 순서로 이어졌다.

김 상임대표는 인사말에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가족”이라며 “강화의 평화가 인천과 서해를 넘어 한반도와 아시아의 평화로 이어지길 소원하며 평화가 이뤄지는 그날이 오도록 우리 모두 힘을 모으자”고 당부했다.

▲ 김의중 상임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 작가는 강연을 통해 “흔히 한반도 문제를 남북관계로만 보는 경향이 있지만 한반도를 휩싸고 있는 유엔체제를 포함해야 한반도의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유엔사가 한강하구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남북 당국이 한강하구 공동 이용에 합의한 만큼 우리도 관련 법률을 만들어 우리의 입장을 내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작가는 “한강하구를 ‘중립수역’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엔사의 관할권을 정당화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면서 “남북 당국이 이 곳의 공동이용에 합의한 만큼 ‘한강하구 공동이용 수역’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평화에 대한 내면의 힘을 기르는 순서로, 평화에 대한 상상 -> 평화의 실천 -> 평화 지키기 -> 평화 강화에 이어 마지막 단계로 ‘평화 즐기기’를 제안하며, “평화의 위기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평화 즐기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행사 참가자 일행은 강연이 끝난 뒤 이 작가의 안내를 받아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로 이동했다.

이 교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이 권사로 활동했고, 죽산 조봉암의 학창시절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함경도 단천 출신인 이동휘 선생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삼남검사관 등을 거쳐 1903년 강화진위대장으로 임명됐다.

선생은 강화에 부임한 이후 근대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강화 출신 윤명삼, 유경근 등과 함께 육영학원(보창학원의 전신)을 세우는 등 민족교육에 매진했다.

▲ 이시우 작가가 강화중앙교회에서 이동휘, 죽산 조봉암의 업적과 발자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05년 2월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화진위대가 축소되자, 진위대장직에서 사임하고 보창학교의 교장을 맡아 군내 21개 지교를 비롯한 72개 학교를 설립했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는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열무당에서 의병전쟁을 선포하는 연설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투옥과 유배생활을 되풀이했다.

1912년 석방된 그는 북간도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올랐지만 이념적 문제로 인해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작가는 “이동휘 선생은 레닌이 주창해 민족해방이론과 유라시아 의제로 채택됐던 ‘민족 식민지 테제’의 초안을 작성했다”며 “이 ‘민족해방’ 의제는 2차 대전이 끝나는 시점까지 유라시아의 질서를 주도했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이어 이 교회에서 이동휘 선생과 인연을 맺은 또 다른 정치 거목 죽산 조봉암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조봉암 선생의 탁견은 진보당 강령에 핵 문제를 포함시킨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며 “진보당 창당 때 후배들이 강령을 만들어 찾아오자 ‘한 가지만 추가하자’며 강령 1호에 핵 문제를 넣었다”고 말했다.

농지개혁과 관련해서는 “죽산은 이미 일본과 러시아, 중국 등지의 농지개혁 문제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지만, 전국을 순회하며 현지 주민들의 입장을 빠짐없이 청취하고 연일 신문에 이를 게재해 농지개혁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일행은 마지막 일정으로 조선조 때 대규모 난전이 펼쳐졌던 갑곶나루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을 거쳐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6.25 전쟁 민간인 학살 위령지에 도착했다.

▲ ‘사진으로 보는 서해평화 강연회 및 평화 탐방 행사’ 참가자 일행이 길상면 온수리 민간인 학살 위령지에서 이시우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 곳에서 이 작가는 당시 강화군 13개 읍면 중 12개 지역에서 무차별 자행된 민간인 학살 의 아수라장에서도, 좌우의 대립을 넘어 희생자를 최소화한 기적 같은 ‘인간애’를 소개했다.

이 작가는 먼저 “한국전쟁 당시 강화 양민학살의 배후에 군과 경찰의 조직적 비호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돼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지만,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교육을 하라’는 진실화해위원회의 마지막 권고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서두를 뗐다.

이어 강화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의 현장에서 구해낸 안순, 윤성근 씨의 활약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6.25 발발 직후 북한 인민군의 강화 점령 당시, ‘안순’이라는 인사가 양도면 인민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 때 인민군은 우익 인사를 처단하기 위한 명부를 갖고 있었으나, 안순이 인민위원장의 지위를 이용해 좌익에 의한 주민 학살을 저지했다.

하지만 인민군이 후퇴하고 유엔군이 들어오자 안순은 부역자라는 이유로 처형돼 건평리 앞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

안 씨와 반대 진영이었던 강화향토방위특공대 화도면대장 윤성근 씨는 강화군 13개 읍면 중 유일하게 화도면 한 곳만 민간인 학살의 피해를 비켜가게 한 주인공이다.

유엔군이 진주한 뒤 인민군 부역 혐의를 받던 길상면과 화도면 주민들은 처형 직전 길상시장 양조장에 수용되어 있었다. 이 때 윤 씨가 면대장 직권으로 자기 관할인 화도면 주민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화도 주민들은 이후 길상면 사람들이 길상면 사슬재에서 모두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윤 씨의 활약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윤 씨의 이런 일을 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강점기 때 화도면 주민들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단결해 민족학교를 설립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일제에 대항했던 끈끈한 힘이 해방 후에도 계속해 이념을 떠나 서로 화합하는 배경이 된 것이다.

▲ ‘사진으로 보는 서해평화 강연회’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작가는 “한국 전쟁 당시 좌우 정부가 나서 서로를 죽이도록 명령한 소용돌이 속에서 두 사람이 보여준 행동은 기적 같은 일”이라며 “전쟁을 피해갈 수 없지만 개인의 평화에 대한 신념까지 국가에서 무참하게 짓밟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라고 강조했다.

그는 “평화는 엄청난 고뇌와 시련을 거치면서 승화시킨 자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며 “평화를 교육할 때, 비록 전쟁에서 다른 사람을 가해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런 상황을 거부하고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것까지 교육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사진=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