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일이 수선한 터에 무더위까지 덮쳐 세상만사 대하느니 짜증스럽다. 얼마 전까지 “대∼한민국”외치면 눈꼴 시린 일이 단번에 가셨는데 그 때의 열기를 되 지필 불쏘시개가 없다.
 신명을 이어 돋울 구심점이어야 할 국회는 개점휴일이고 지방의회 또한 사공 없이 표류하기는 매일반이다. 그나마 더위 먹은 탓일까 정가주변에서 들려오기를 상호 비방과 욕설이 심심하지 않으니.
 새삼 `개떡"" 같다는 서두를 펴는 까닭은 극한대립과정에서 애꿎은 개를 빗댄 욕지거리가 듣기 거북하기에 점잖은 위인으로 하여금 반성의 여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왕지사 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개만큼 친근하고 미더운 동물이 따로 있겠는가. 덴마크 해안 패총(貝塚)의 화석을 통해 미루어 보건대 개의 가축화는 이미 1만 2천년으로 거슬러 오른다니 깊은 어울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옥편에 담긴 한자 부수(部數) 찾기에서 개(犬)를 변으로 한 문자가 무려 579 자에 이른다는 사실은 인간과 개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예증할 보기라 할 것이다.
 허나 개와 관련된 속담풀이가 많은 것은 그만큼 친근한 표시라 할 지라도 허물없는 동물이라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것은 인간이 지닌 편견과 오만이다.
 방금 복 달임에 수난을 겪고 있는 견공(犬公) 입장을 대변할진댄 우리가 뭐 잘못했기에 매사 업신여기는가 하는 반감이 나설 법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개만도 못하다”고 입에 거품 무는 싸움판일 수록 툭하면 “개<&28364><&28364>, 개 같은<&28364>” 등 상소리가 튀는데 어째서 의리와 책임감이 남다른 개에다 빗대는가 함이다. 더욱이 지도급 인사들 간에도 이를 애용하기 인색치 않으니 민망할 따름이다.
 인간은 동족과 골육상잔(骨肉相殘)의 극한수단을 마다 않아도 개는 개를 잡아먹지 않는다.
 개는 사흘을 키우면 주인을 알아보고 삼 년 은혜를 잊지 않는다 던대 아마도 개 세계에선 “사람만도 못한 <&28364>”이란 욕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흔히 개 눈엔 <&28364>만 보인다지만 정작 벼슬자리에 오르면 돈 냄새만 좇아다니는 위인은 개보다 얼마나 향기롭다는 것인가.
 우리에게 음미할 하나의 고사가 있다. 개 한 마리가 무엇인가를 보고 짖으면 백 마리 개가 따라 짖는다 했다. 단순히 짖는 소리에 쫓아 울어대는 것처럼 인간사회서도 확인되지 않은 언사가 무책임하게 오갈 경우 그릇된 여론을 형성하기 마련이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一犬吠影 百犬吠聲 一人傳虛 萬人傳實. -潛夫論-)
 하기야 개가 아무런 뜻 없이 짖는지 아닌지는 개 마음을 드려다 보지 못한 인간이 헤아려 가늠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림 짚이는 것은 개가 짖는 배경에는 의심과 믿음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큰 도둑이 애써 키운 개는 성인군자가 앞에 나섰다 하더라도 낯설면 짖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통해 개와 사람의 가치관 차이는 이런 점부터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맹목적 섬김을 지양하고 경우에 따라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인간이 지닌 진면목이라 할 것이다.
 일러서 “개가 서쪽을 향하면 꼬리는 동쪽을 향한다” 하거니와 이는 삼척동자도 알고 남는데도 정작 이처럼 당연한 문제를 참신한 것처럼 되뇌는 일이 우리 주변엔 다반사다.
 나의 넋두리 또한 뻔한 `개수작""으로 들리지 않을까 은근히 켕기면서도 세상은 이렇듯 당연한 이치가 아무런 여과 없이 반복되고 있음이 분명하니 이 어찌 개가 웃을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