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사이 잡힐 듯 가까운 염원의 땅, 파주. DMZ 위로 싹트는 평화가 비극으로 얽힌 분단의 실타래를 조금씩 조금씩 풀어간다.
20세기 한반도와 동아시아 냉전의 역사를 간직한 곳, 한반도 평화의 불씨가 되길 기원하며 '경기 북부 DMZ 에코뮤지엄' 그 여섯 번째 여정 '파주평화캠프에코뮤지엄'으로 안내한다.
임진각
임진각은 군사분계선에서 7㎞ 남쪽 지점에 있는 국내 대표적인 통일 안보 관광지다. 정식 명칭은 '임진각국민관광지'이나, 보통 '임진각'으로 줄여 부르곤 한다. 민간인이 갈 수 있는 남한의 가장 끝 지점인 이곳은 1972년 남북공동설명 발표 후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을 위해 세워졌다. '임진강의 누각'이라는 뜻을 가진 임진각 일대로는 지상 3층, 지하 1층, 대지 1만9835㎡(6000평) 규모의 편의시설인 경기평화센터가 들어 서 있다. 센터 내에는 각종 기념상품점이나 전시실을 비롯해 임진각 전경을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를 갖추고 있다. 특히 전망대에서는 산으로 둘러싸인 탓에 북한지역을 보기 어렵지만, 날이 좋을 경우 간혹 개성이 내려다보인다고 한다.
임진각 본관 건너편에는 1985년 9월26일 세워진 망배단(望拜壇)이 있다. 매년 명절 때면 실향민들이 이곳에 와서 고향을 향해 절을 하는 곳으로 향로와 망배탑이 있다. 망배단 뒤쪽으로는 1953년 건설된 자유의 다리(경기도 기념물 제162호)가 놓여 있다.
도심으로부터 접근성이 뛰어나고 별도의 허가절차 없이도 방문할 수 있어 매년 600만명의 내·외국인이 찾는다고 한다.
자유의 다리
경기도 기념물 제162호이다. 임진각 광장 앞 망배단 뒤편에 놓인 다리로,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만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 귀환했기 때문에 '자유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원래 경의선 철교는 상·하행 2개의 다리가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면서 다리의 기둥만 남아 있었는데, 전쟁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서쪽 다리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이 임시다리를 설치했다.
당시에는 포로들이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와서는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왔다고 한다. 자유의 다리는 길이 83m 폭 4.5m 높이 8m 내외다. 다리는 나무를 짜 맞추어 만들었는데 특히 힘을 많이 받는 부분은 철재를 혼합해 사용했다. 임시로 설치한 다리이므로 건축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유산으로 알려져 있다.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는 한국전쟁 중 피폭, 탈선된 후 반세기 넘게 비무장지대에 방치돼 있던 남북 북단의 상징물이다. 2004년 아픈 역사의 증거물로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로 등록된 후 녹슨 때를 벗겨 내고 역사교육자료로 활용하고자 하는 경기도의 적극적인 의지에 따라 현재까지 전시되고 있다.
당시(1950년 12월31일) 이 열차를 운전했던 기관사의 증언에 따르면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던 도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황해도 평산군 한포역에서 후진해 장단역에 도착했을 때 파괴됐다고 한다. 이 기관차에 있는 1020여개의 총탄 자국과 휘어진 바퀴는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장파리 캠프 에코뮤지엄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장마루)는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미군 주둔에 따른 기지촌 마을의 대표적인 마을이었다. 1960~1970년대 장파리 마을은 달러가 넘쳐났고 달러벌이를 위해 외지에서 들어 온 수많은 사람이 미군을 상대로 한 여성들(약 2000명 추산)을 위한 클럽, 다방, 세탁소, 미용실, 편의점 등을 세우면서 번성했다고 한다.
1980년대 이후 미군들이 철수하면서 외지인들 대부분이 장파리를 떠났고 장파리 마을은 급격하게 쇠락했다. 그런 가운데 다시 호황을 누리던 일부의 상가 건물이 그대로 남아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클럽 라스트챤스
장파리에는 7개의 미군 클럽이 있었으나 그 중 거의 완벽에 가까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클럽이 라스트챤스다. 라스트챤스는 가왕 조용필이 연주 생활을 처음으로 했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현재 개인소유로 클럽 건물은 지난 10월27일 경기도등록문화재로 정식 등록됐다.
-재건중학교
재건중학교 건물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미군의 지원으로 건물을 짓고 학생들이 공부했던 건물로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는 개인소유로 전혀 활용되지 않는 상태다.
-성병진료소
장파리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성병 진료를 했던 병원으로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후 다른 용도로 사용됐으나 현재는 공가로 남아 있다.
-천주교 장파리공소
기지촌의 어린아이들을 보호하고 교육했던 유치원 역할을 했던 곳으로 현재도 천주교 공소로 기능하고 있다.
-소라다방
장파리에 10여 개의 다방이 있었으나 현재는 1개의 다방이 남아 운영을 이어오고 있다.
-장파리방앗간
장파리 유일의 방앗간으로 건물과 내부 시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리비교
장파리 기지촌 마을로 들어올 수 있는 임진강의 교량으로 1953년 가설된 다리다. 이 다리를 통해 수많은 미군이 장파리 마을을 오고 갔다. 그러나 노후화로 인해 2020년 6월 리비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리비교 부자재를 새로 가설될 다리 인근에 보존한다는 것이 시의 방침이다.
황희선생유적지
황희선생유적지는 조선 초기 명재상이며 청백리의 귀감인 방촌 황희 선생의 유적지다. 선생은 개성 태생으로 판강릉대도호부사군서의 아들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관직에서 나오게 됐다. 선생은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 정비에 노력했고 세종 연간에는 19년간 의정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 재직하면서 세종 성세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문종 2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탄현면 금승리 선영에 예장하고 세종 모정에 배향됐다. 시호는 익성이다.
유적지 내에는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세조 1년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황희선생영당과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여생을 보낸 반구정이 있다. 본래의 영당 건물은 6·25전쟁 때 전부 불탔으나 1962년 후손들이 복원했고 영당 내부 중앙에 별도의 감실을 두고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용미리마애이불입상
보물 제93호로 화강암 천연암벽을 몸통으로 삼아 그 위에 목 ·머리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은 전체 높이 17.4m의 불상이다.
자연석을 그대로 조각하면서 신체의 비율이 맞지 않아 기형으로 생긴 것이 특징이며 양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 연화 모양을 하고 있다. 사각형 갓(방립)을 쓴 불상과 원형 갓(원립)을 쓴 불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원립을 쓴 불상은 남자, 방립을 쓴 불상은 여자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1995년에 발견된 명문으로 이 석불입상이 고려 시대의 작품이 아니라 1465년(세조 11)에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을 미륵불로 조각한 것이라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이 불상들의 형태는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고려 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마정리 평화충전소
철책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마정리 마을은 임진강이 마을을 휘감고 있으며, 드넓은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자연생태부락이다. 하지만 그 이면으로 마을 언덕 위에는 분단의 상징인 강변 철책 길이 놓여 있고, 마을 바로 옆 장산리로는 마을 주민들이 처참하게 죽어간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초평도가 위치한 곳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마정2리는 마정리에 속한 4개 마을 중에서도 65세 이상의 인구가 가장 많은 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마정리의 근현대사를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남기고자 경기 에코뮤지엄 사업의 하나로 민방위 주민 대피소를 개조해 마정리평화충전소로 조성하고 있다.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참고문헌: 경기북부 DMZ 에코뮤지엄 종합발전계획 수립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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