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 김구 선생 탈출로 현장 답사단이 인천감리서 자리에 설치된 안내문을 살펴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지부장·김재용)는 지난 6일 오전 중구 동인천역과 신포동 일대에서 김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김구 선생의 탈출로와 해방 후 인천 방문로 현장 답사’를 진행했다.

이날 답사는 장회숙 인천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장과 이희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가 각각 해설을 맡았다.

오전 10시 동인천역 앞에서 출발한 답사단은 전동고개-내리교회-인천감리서터-청년 김구거리를 거쳐 인천축항1부두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백범은 인천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청년 시절 김창수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백범은 1896년 스물 한 살의 나이로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죽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백범은 1896년 8월 초 인천감리서로 이감됐다. 백범의 아버지 김순영 옹과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인천으로 거처를 옮겨와 감리서 근처 객주에서 일을 하며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고종의 사형집행 중지명령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1898년 3월 탈옥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부친 김순영 옹이 아들 대신 1년간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 이희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가 백범의 탈출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백범은 이후 1911년 안악사건과 105인 사건으로 다시 구속돼 15년 형을 선고받고 인천감리서로 또다시 이감됐다.

이 때 백범은 인천항 축항공사 노역에 동원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백범일지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인천 축항공사에서 지게에 흙을 잔뜩 짊어지고 허리에는 철쇄로써 다른 최소와 연락당한 채로 높은 층계에 운반케 되었으나 피로에 찌들어 전신을 움직일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1915년 가석방 된 김구는 상해로 넘어가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45년 상해에서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맞이한 이후 11월 23일에야 고국 땅을 밟게 된 백범은 도착 즉시 인천 시대의 의인이었던 김주경의 유가족을 찾아오라고 신문에 보도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김주경은 백범이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했던 은인이었다. 강화 관아 서리 출신인 김주경은 백범이 인천 감리서에 갇히자 백범을 구명하기 위한 소송비용으로 전 재산을 탕진했다.

김주경은 김구를 탈옥시키기 위해 지하조직을 만들기도 했으며, 여기에 가담했던 인물들은 뒷날 모두 서북간도와 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인천감리서에서 탈출한 백범은 강화 김주경의 집을 찾아가 석 달 동안 서당을 열고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했다. 1947년에는 강화에 살던 김주경의 셋째 동생 진경의 집을 방문해 고마움을 전했다고 한다.

인천에서 백범을 도운 또 다른 인사로는 유완무 선생과 박영문, 안호연 등이 꼽힌다. 부평 시천동 태생인 독립운동가 유완무 선생은 김주경으로부터 백범 투옥 사실을 전해 듣고 청년 13명을 뽑아 모험대를 조직한 뒤 인천항 주요 지점마다 밤중에 석유통을 지고 들어가 7, 8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부숴 김창수를 구출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거사 사흘 전에 백범이 다른 죄수들과 함께 탈옥하는 바람에 실행되지 못했다.

▲ 장회숙 인천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장이 백범이 투옥됐던 인천감리소 터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후 청년 김구에게 김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독립운동가로의 의식을 심어주는데 힘을 쏟았다. 이후 국내에서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건너가 훈춘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군대를 양성하는 등 독립운동에 매진했으나 독립군 내부의 갈등으로 1907년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1951년 '순국선열유가족심사위원회'는 순국선열을 선정하면서 선생의 이름을 올렸으나 2009년에 가서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을 수 있었다.

박영문과 안 호연은 백범의 부모가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머물던 객주의 주인이었다. 박영문은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에게 하루 세끼 식사와 감옥에 넣어줄 밥을 챙겨주었다. 또 다른 객주였던 안호연도 백범과 곽 여사를 극진한 정성으로 대하였다고 한다. 박영문이 운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객주는 중구 내동 ‘월아천’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백범이 1946년 첫 지방순회를 할 때 가장 먼저 찾은 곳도 인천이었다. 그해 4월 14일 인천을 방문한 백범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감리교회인 내리교회 예배당을 방문해 예배와 함께 신도들을 상대로 강연을 한 뒤, 송월동 양조장과 송현동 조선차량주식회사를 시찰했다.

이어 신생동 동양헌에서 인천 시내 유지들이 마련한 환영오찬에 참석했다가 오후 2시를 넘겨 인천을 떠났다. 백범은 그 해 11월에도 이틀 동안 강화도를 방문했다.

공교롭게도 백범을 저격한 안두희가 피살당한 곳도 인천이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인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경기도 부천 소신여객 소속 버스 운전기사였던 당시 46세의 박기서 씨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80세의 나이로 숨졌다.

▲ 답사단 일행이 이희환 연구교수로부터 백범의 해방 후 인천 방문로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다.

백범기념사업을 주도한 인사는 인천의 대표적 정치인 중 한명인 곽상훈 선생이다. 독립운동가인 그는 백범이 인천을 찾았을 때 두 번이나 안내를 맡았다. 1948년 인천에서 제헌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해 대통령 권한대행, 국회의장, 대한민국헌정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1954년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곽상훈은 1961년 박정희 군사쿠데타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군사정권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1972년 제4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야당 동지들의 격렬한 규탄을 받았다.

곽상훈은 1968년 백범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아 백범 서거 20주년을 기념해 동상 건립을 의결하고 1969년 8월 서울 남산에 백범 동상 제막을 거행했다.

이후 27년 뒤인 1996년 전국 순회로 열렸던 백범 김구의 ‘겨레사랑’이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전시실에서 개최되고 백범 김구 선생 동상건립 인천시민위원회가 조직돼, 1997년 전국 최초로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인천대공원에 백범광장을 조성하고 백범 동상을 건립했다.

이때 1949년 제작된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의 실물크기 동상이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전시관에서 인천대공원 백범 동상 옆으로 옮겨졌다.

▲ 김구 선생의 탈출로와 해방 후 인천 방문로 현장 답사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인천시와 중구청은 백범이 옥살이를 하던 중구 내동의 옛 인천감리터에 1528㎡ 규모의 역사 공원을 만들고 탐방로인 ‘청년 김구의 길’을 조성하는 사업을 올해 연말 완공을 목표로 진행 하고 있다.

‘청년 김구의 길’은 백범이 노역했던 인천 개항 축항로와 곽 여사가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걸었던 돌계단, 인천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감옥을 탈출했던 ‘탈옥로’ 등 1.6㎞ 구간에 조성된다.

인천시의 지원을 받아 ‘2021년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오는 20일, 개항기의 역사를 문학 작품에서 찾아보는 ‘철도원 삼대’ 현장 답사를 진행한다.

황석영의 소설 ‘철도원 삼대’를 통해 일제가 설치한 ‘수탈과 저항의 철도 역사’를 현장에서 살펴보게 된다.

이어 오는 27일 분단의 현장을 찾아가는 ‘임진각, 도라산 역 현장 답사를 끝으로, 올해 진행된 아홉 차례(포럼 2회, 답사 7회)의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을 모두 마무리한다.

/글·사진=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