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23일 ‘2021년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네 번째 행사로 ‘부평지역 일제 잔재’와 ‘미군기지 캠프 마켓’ 등을 돌아보는 ‘일제 강제동원 현장 답사’를 진행했다.

부평 미쓰비시 사택과 부평공원, 캠프 마켓, 부평토굴 등을 차례로 답사한 이 날 행사는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와 박명식 부평문화원 이사의 해설로 진행됐다.

 

▲미쓰비시 줄사택

첫 답사 장소인 ‘미쓰비시 줄사택’은 일제강점기 때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합숙소로 쓰였던 건물이다. 작은 집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고 해서 줄사택이라고 불리며, 미쓰비시의 한자 표기인 삼릉(三菱)을 붙여 삼릉줄사택이라고도 한다.

이 건물은 1938년 군수물자 생산 공장인 미쓰비시중공업이 노동자들의 합숙소로 쓰기 위해 지었다. 현재 이곳을 둘러싸고 흉물로 전락한 건물을 철거한 뒤, 공영주차장을 짓자는 주장과 강제 동원된 노동자들의 생활 상을 엿볼 수 있는 유산으로 남겨두자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 철거와 보존 논란 속에 흉물로 방치된 미쓰비시 줄사택

▲부평역 일대

답사단 일행은 부평역 고가다리를 지나 부평공원으로 이동했다. 김 대표는 “부평역은 근대 이후 부평지역의 변화를 예고하던 상징물 같았다”고 설명했다.

조선 시대 때 부평도호부의 중심지는 지금의 계양구 계산동 일대였지만 부평역이 설치되면서 부평지역의 중심지가 철도역 주변으로 옮겨진 것이다.

1930년 중반 이후 일본이 조선 병참 기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 일대에 인천육군조병창과 히로나카상공 부평공장, 국산자동차공업, 디젤자동차 조선제조소, 동경자동차 부평공장, 오사카 철사공장, 고주파 부평공장, 경전 와사제조장 등을 건설했다.

철도역에 근무하던 직원들을 위한 철도관사도 건립돼 부평남부역 남쪽 일대에 넓게 자리 잡고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주택이 사라지고 관사 터 만 남아있다. 관사 중 1채가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가 부평공원에 설치된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 옆에서 인천육군조병창에 끌려간 조선 학생과 노동자들의 강제 노역 실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부평연습장과 인천육군조병창

일제는 황무지 상태로 남아있던 부평역 인근 지대를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했다. 일본은 이후 이곳에 육군조병창을 건설했다.

부평 육군조병창은 일제가 만주침략에 사용할 무기를 생산하던 공장이다. 일본 본토 밖에 남아있는 사실상 유일한 일제의 대규모 무기 생산시설이다.

이곳은 특히 어린 중고등학생을 비롯한 조선인 1만여 명이 전국 각지에서 끌려와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아픈 역사적 기억을 품고 있는 장소다. 1944년 학도동원 비상조치 요강이 발표된 후 인천공업학교, 인천중학교, 인천상업학교, 인천고등여학교, 인천소화고등여학교 등에서 학생 360명이 동원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부평조병창 내 독립운동 기록

김현석 대표는 “인천육군조병창 내에서 독립운동이 시도됐고 황장연과 오순환의 사례가 확인됐다”면서 “이중 황장연은 고려재건당이란 조직을 만든 후 1944년 임시정부에서 밀파된 신교선에게 조병창 내 무기를 확보하여 전달하던 중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고 소개했다.

오순환은 서울에서 창천체육회란 조직을 결성한 뒤 조선총독 및 일본 고관의 암살을 목적으로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인천육군조병창 신축 공사장에 지원해 들어갔다가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 부평 미군기지 캠프마켓 벽면에는 미군이 반공포로들을 향해 발사한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벽면의 흰색 부분은 당시의 총탄 흔적을 가린 흔적)

▲캠프마켓

광복 후 인천항을 통해 국내에 진입한 미군은 인천육군조병창을 접수해 군수기지로 활용했다. 애스컴시티라고 불리던 이곳은 1973년 해산될 때까지 주한미군의 대표적 군수기지였으며 기지 내 부대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캠프 마켓이다.

미8군에게 빵을 공급하던 캠프 마켓도 지난 9월 말 업무를 종료해 부평 미군기지는 76년 만에 완전히 미군의 손에서 벗어났다.

김 대표는 “캠프 마켓 내 건물 중 주목되는 것은 병원 건물”이라고 말했다. 일제 조병창 시기와 미군 부대 시기를 거치면서 병원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대한민국 육군 제1병원 역할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캠프 마켓 일부를 공개한 인천시는 시민안전과 환경오염정화를 명분으로 이 건물을 철거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를 비롯한 인천지역 시민단체들은 "부평 조병창 병원 건물은 1940년대 일제 말 일제 침략과 강제징용의 역사적 흔적이고 증거"라며 "반드시 존치되어 일제의 침략전쟁의 만행을 알리는 표지가 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일본조병창 병원 건물 존치를 위한 시민대책위’를 구성한 시민단체들은 인천시의 철거주장에 대해 "조병창 병원 건물 하부에는 맹독성 다이옥신은 없고 유류오염만 확인되고 있다"며 토론회, 공청회 개최 등을 촉구하고 있다.

▲ 박명식 부평문화원 이사가 반공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나려다 미군의 총탄을 맞고 숨진 반공포로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반공포로 수용시설

부평미군기지내 캠프 하이예스는 한국전쟁 당시 반공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지금의 부영공원 자리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기해 반공포로들을 기습적으로 석방하는 명령을 내리면서도 수용시설 경비를 담당하던 미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미군은 갑자기 수용소를 벗어나는 반공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해 40여 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지금도 캠프 마켓 일부 건물 벽면에는 당시 미군이 쏜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박명식 이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말만 믿고 수용소를 벗어나려던 반공포로들은 영문도 모른 채 미군이 쏜 총탄에 억울하게 숨을 거뒀다”면서 “지금이라도 그들의 원혼을 달래 줄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답사단 일행은 이어 일제가 조병창에서 제작한 무기를 숨기는 장소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평 산곡동 함봉산 일대 토굴을 살펴보는 일정을 마지막으로 이날 탐방 행사를 모두 마쳤다.

▲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가 주최한 ‘2021년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부평 미군기지 캠프마켓 안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글·사진=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