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문화캠프에코뮤지엄-평화의 꽃이 피었습니다

동두천, 이름만 불러도 아프고 서럽다. 몰수당한 토지, 환락의 도시, 기지촌 여성, 미군 범죄 등 동두천을 더럽힌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뒤로한 채 평화의 꽃이 이 땅 위에 피어오른다.

20세기 한반도와 동아시아 냉전의 역사를 간직한 곳, 한반도 평화의 불씨가 되길 기원하며 '경기 북부 DMZ 에코뮤지엄' 그 세 번째 여정 '동두천 문화캠프 에코뮤지엄'으로 안내한다.

▲ 평화로운 광암동의 오후, 나팔꽃이 활짝 피었다.
▲ 평화로운 광암동의 오후, 나팔꽃이 활짝 피었다.

▲광암동 턱거리 마을

미2사단 캠프 호비가 주둔하면서 형성됐던 기지촌 마을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미군이 축소되면서 경제가 위축되고 소외된 마을이었으나, 마을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턱거리협동조합과 주민의 힘으로 직접 문을 연 턱거리 마을 박물관이 있다. 2020년부터 '순자문화제'를 열어 평화와 마을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다.

턱거리 마을은 1970년대까지 보산동과 함께 가장 번화한 지역 중 하나였다. 2000년대 들어 동두천시 신시가지 조성과 택지 개발, 주한미군의 이라크 파병 등으로 미군을 상대로 영업하던 많은 업소가 문을 닫게 되면서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때 턱거리 마을 사람들은 '나눔의 집'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등 활로 모색에 나서게 됐고 2014년부터 마을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마을 신문 만들기, 마을 환경미화, 마을역사 기록하기, 마을축제 등의 활동들을 전개해 오고 있다. 실제 2016년 광암동 탑동 일대의 소식을 전하는 '터기리 마을 신문'을 창간하거나 2019년 11월30일 에코뮤지엄인 '지붕없는 박물관'과 거점 공간인 턱거리마을박물관을 개소했다. 또 2020년부터 '순자문화제'를 개최하고 공동체 활성화를 목표로 축제를 열고 있다.

턱거리마을박물관은 1963년부터 구멍가게와 가정집, 클럽으로 이용돼 오다 집주인의 협조와 경기따복공동체, 경기문화재단 후원으로 문화예술공간인 턱거리마을 박물관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기지촌의 역사를 복원해 현재의 문제를 성찰하고 해체돼 가는 지역공동체를 되살리자는 취지가 담겼으며 열린 공간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 기지촌의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조명하는 턱거리마을 '순자문화제'는 작년부터 열리고 있다.
▲ 기지촌의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조명하는 턱거리마을 '순자문화제'는 작년부터 열리고 있다.
▲ 턱거리마을 '순자문화제'에서 상여를 옮기고 있다.
▲ 턱거리마을 '순자문화제'에서 상여를 옮기고 있다.

지난해부터 개최해 오고 있는 '순자문화제'는 기지촌의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가지게 된 지역 축제다. 축제에 기원에는 두 명의 순자가 등장한다. 한 명의 순자는 그가 죽자 이 여성을 사랑했던 미군이 봉분과 비석을 세워 사랑이 영원함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고 또 한 명의 순자는 홀로 늙어 가며 과거의 기억 속에서 미군의 존재를 지워내려 했던 여성이었다.

공교롭게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순자를 통해 당시 기지촌에서 살아간 여성들을 재조명하게 된 마을 주민들은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치열한 경제 성장의 역사 속에서 순자라는 여성들이 처했던 현실을 돌아보고 기억해 냄으로써 기지촌의 역사와 문화를 한국 근현대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했다.

▲ 쇠목공여지반환기념비
▲ 쇠목공여지반환기념비

 ▲쇠목공여지반환기념비

1990년 '주한미군공여지' 반환운동의 발원지다. 주한미군이 사용하는 땅을 공여지라 부르는데, 쇠목의 공여지 반환운동은 공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반환받을 수 있도록 한 우리나라 최초의 싸움이었다.

쇠목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우리 땅을 되찾는 공여지 반환 운동은 전국으로 불꽃처럼 퍼져나갔다. 결국 2006년 정부는 한미 간 연합토지관리계획과 용산기지 재배치계획에 따라 전국에 산재한 주한미군기지를 평택 등 5곳으로 통폐합하기로 하면서 동두천을 비롯해 부산, 춘천, 인천, 파주, 의정부, 화성, 용산 지역의 기지 일부가 반환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쇠목마을 주민들은 미군 기지로 많은 고통을 겪어왔었다. 이 마을에 미군 공여지로 인한 사유재산권 침해문제가 두드러지게 된 것은 1995년 주민 김병규씨가 자신의 소유지에 음식점과 주택을 짓기 위해 동두천시에 농지전용 허가 신청을 하면서다.

동두천시는 반년이 지난 뒤에야 당해 토지가 주한 미군 부대 사전협의 대상 지역이라는 이유로 건축 불가를 통보했다. 마을의 토지가 미군에게 공여되었음을 알게 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이때부터 미군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반발은 커졌다. 이듬해 논과 밭에 폐탱크와 장갑차 8대가 배치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미군이 주민들과 아무런 사전협의나 동의 없이 미군의 사격장 확장 계획이 알려지면서 격렬한 반대 운동을 벌이게 됐다.

2000년 초 또다시 쇠목마을에 탄약고를 짓는 계획이 발표되면서 쇠목마을 주민들은 겨울 석 달 동안 동두천 시내에 천막을 치고 탄약고 건설 반대 농성을 벌였다. 이에 반발하며 탄약고가 들어설 부지 입구에 4m 높이의 해원탑을 세우기도 했다. 국방부와 미군에서는 이 탑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법적 조처를 하겠다고 경고를 했지만 지금도 이 해원탑은 쇠목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포크레인과 탱크로부터 지키고 있다.

▲ 동두천시에 주둔한 미군 육군의 제1지역 군영이었던 캠프 호비(Camp Hovey).
▲ 동두천시에 주둔한 미군 육군의 제1지역 군영이었던 캠프 호비(Camp Hovey).

▲걸산동

한국전쟁 직후 동두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에게 땅을 몰수당하고 고립된 대한민국 유일의 오지마을이다. 주민들은 60여 년을 넘게 미군 부대를 통과하거나 산을 넘어다녀야 했고 광암동 쪽으로 1차선 도로를 개설했지만, 여전히 교통의 불편함을 겪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미군에서 발행한 통행증으로 미군 부대를 통해 출입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요산 자락으로 산세가 수려하고 포근한 마을로 '육지 속의 섬'으로도 불린다.

걸산동은 한국전쟁의 전선이 고착되면서 미군 보병 제24사단이 주둔하게 되자 동두천시의 42%에 달하는 논, 밭, 임야 심지어 집까지 정부에 징발돼 미군에게 제공됐었다. 1952년 걸산동 일대에 미군이 1415만㎡ 규모의 공여지를 확보해 캠프 케이시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마을 땅은 헐값에 징발당했고 시내와 통하는 길이 기지에 가로막히면서 걸산동은 육지 속에 섬이 됐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걸산동 주민들은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고립된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 마을의 입구와 남쪽은 미군 부대가 진을 치고 있어 통행이 불가능하고 동북쪽은 소요산 줄기가 가로막고 있다.

미군 부대를 통과하려면 미군기지 관리부대가 발급한 통행허가증을 출입할 때마다 제시해야 한다. 통행허가증은 3년마다 재교부받는데 미군이 내준 통행허가증이 없으면 집에 가지 못한다. 손님을 맞으려면 마을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인 미군 부대 정문으로 마중 나가 직접 확인을 받아야 드나들 수 있고 외부 성묘객들도 보름 전에 신청해야 한다. 사실상 도시 속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턱거리 마을 푯말.
턱거리 마을 푯말.

▲선돌

입석이라고도 한다. 고인돌, 열석과 함께 대표적인 거석문화의 하나로 마을 입구의 장승과 같은 역할을 한다. 안흥동 담안에 3점의 선돌(높이 245㎝, 폭 110㎝)이 있으나 찾아가서 볼 수 있는 것은 1점이다. 고인돌과 선돌이 1기씩 짝지어 나타나는 사례는 극히 드문 것으로 동두천의 청동기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접근의 필요성을 확인한 상당히 중요한 유적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청동기 유적의 존재는 동두천 지역사를 고조선 시대까지로 끌어올리는 확실한 방증이다.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참고문헌: 동두천을 찾고 잇다

 


 

#최희신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사무국장 인터뷰

▲ 최희신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사무국장
▲ 최희신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사무국장

“동두천을 동북아 최대 평화거점으로 삼아 경제 선순환 구조 이뤄내야 합니다.”

삼팔선 아래 첫 남쪽 마을, 동두천을 떠올릴 때, 어떤 이는 내 땅에 살지언정 떳떳하지 못하다 말하고 어떤 이는 아프고 서러운 동네라며 꼬집었다. 그런데도 동두천에서 나고 자라 누구보다 오랜 시간 이 지역을 지켜봐 왔을 최희신(사진)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사무국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서럽고 힘들었던 시절을 추억처럼 말하고 한반도 역사에서 동두천이 차지하는 자리를 당당하게 말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동두천은 부산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생겨날 만큼 번영한 도시였죠. 미군 기지촌에서 벌어들이는 규모가 국내 GDP 1%에 달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우스갯소리로 동네 개들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얘기가 있었죠. 점차 쇠퇴해 가는 우리 지역을 보면서 안타깝고 속상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전국 각 지역으로 기지촌이 빠르게 형성돼 갔다. 동두천은 기지촌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차지했던 만큼 지역민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있었다. 이라크 파병을 기점으로 국내에 주둔하던 미군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도시는 점차 쇠락해 갔다. 이 때문에 여러 지역에 형성된 기지촌 중에서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동두천은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최 사무국장은 지역 쇠퇴화의 원인을 여기에서 찾았다.

“동두천의 지역 경제 활성화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미군으로부터 이어가던 경제구조의 도시에서 미군에 의존도는 매우 높았죠. 같은 기지촌이 있던 용산이나 평택, 가까운 의정부와의 격차가 벌어진 것은 생산 기반 시설이 없는 상태로 미군에 의존해 왔기 때문입니다. 당장에 미군 기지 부지를 반환받는다고 해도 당장에 대안이 없다는 거죠. 20년 아니 30년은 이 상태 그대로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동두천 지역에 반환받지 못한 미군 기지 규모는 2975만2066㎡(900만평)에 이른다. 지금도 지역사회에서는 기지반환과 주한 미군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지만, 기지가 반환된다고 한들 대책이 없다는 의미다. 최 사무국장이 목소리를 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동두천의 지역 발전을 위한 대안으로 '평화연구단지'를 제안했다.

“동두천을 평화의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군 기지가 반환되고 난 뒤 산업단지, 생산기지 등을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평화연구단지를 조성해 평화 세미나, 포럼, 학회와 같이 전 세계를 선도하는 평화의 요충지로 충분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곳이 동두천입니다. 이를 통해 지역 경제 활성화를 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최 사무국장은 에코뮤지엄을 지역 발전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역 활성화를 끌어내기 위해 내 지역을 아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개발만이 능사는 아니죠. 비록 과거의 어두운 면이라 할지라도 보존하고 답습해 과오를 번복하지 않는 과정이 중요하겠죠. 지역 발전에 시작은 우리 지역에 살아간다는 게 자랑스러워지는 것에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는 지역에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에코뮤지엄의 취지 아닐까요?”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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