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하구 삶 이야기] 1. 경계와 금단의 한강하구

70여년간 남북의 보이지 않는 경계 돼
전쟁 포화 피해 교동도 향했던 사람들
가족 생이별 슬픔 속 억척스레 삶 일궈

물을 품고 있지만 누구도 쉽게 배를 띄울 수 없는 그 곳 한강하구. 한국전쟁 이전 한반도 번영의 상징이었던 한강하구는 이제 금단의 구역이 됐다. 하지만 한강하구에는 여전히 땅과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인천일보는 한국전쟁 후 시계가 멈춰버린 한강하구의 다양한 이야기를 총 6회에 걸쳐 찬찬히 살펴본다.

서해 앞바다와 기름진 갯벌을 품고 있는 인천.

물의 도시란 말이 아깝지 않을 풍부한 해양 자원과 해양 친수 공간을 갖춘 인천은 바다가 아닌 또 다른 거대한 물줄기 하나를 품고 있다. 바로 한강이다.

강원도 태백산맥 금대봉에서 발원해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한강의 최종 종착점은 서해와 만나는 강화만, 우리는 이 일대를 한강하구라 부른다.

물에는 경계가 없다. 하지만 한강하구에는 남과 북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만우리에서 강화군 서도면 말도로 흐르는 67㎞ 이 구역은 또 하나의 비무장지대(DMZ), 한강하구 중립수역이다.

▲ 인천 강화군 교동면 망향대에서 관광객이 망원경을 통해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다.
▲ 인천 강화군 교동면 망향대에서 관광객이 망원경을 통해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70여년간 금단의 구역, 닫힌 공간이었던 한강하구는 하나의 거대한 '경계'다. 강과 바다를 나누는 경계이자 남한과 북한이 맞닿는 경계다.

중심을 벗어난 주변과 경계 지역은 차별과 배제, 그리고 위험이 상존하는 설움의 공간이다. 한강하구는 한강 상류에서 흘러온 쓰레기와 하수, 비점오염원에 몸살을 앓고 있다. 한강하구 주민들은 남북이 총부리를 겨눈 대치 상황에 긴장을 늦출 수 없고 국가 안보란 명분 아래 이동조차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변화는 중심이 아닌 변방과 경계에서 늘 일어났다. 한강 끄트머리가 아닌 서해의 시작점이자 한반도 남쪽 끝이 아닌 북의 시작점인 한강하구는 그래서 평화의 교두보, 생태계의 보고로서 열린 공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경계에서도 삶은 이어진다. 한강하구를 품고 있는 인천 강화군 교동도. 교동대교가 끊기면 영락없이 닫힌 섬이 되는 이 곳 교동도는 북한과 인접한 한강하구의 경계 중에서도 경계에 있는 지역이다.

1550여 세대 2919명이 살고 있는 교동도. 이 마을에는 경계인들의 아픔과 슬픔이 곳곳에 배어 있다. 국경을 마주한 실향민들의 한이다.

“황해도 연백군 운송면 낙선리 132번지에 살았어요. 6.25사변 나서 부모님 곁에서 걸어나온 생각은 납니다. (여기) 와서 여기 초등학교 들어갔죠 바로. 어머니 아버지는 땔감 없어서 산에 나무하러 가시고, 식량도 별로 없어서 굶다시피해서 그냥 미국에서 지원해주는 거 있어요 밀가루 이런 거, 그거 주면 그걸로 끼니해서 먹었죠. 여기(한강하구 중립수역) 그 전에는 철책을 안쳤어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해안가 다 철책 쳐서 일반인들이 숭어도 잡고 낚시도 잡고 했는데 지금은 꿈쩍 못해요, 못 들어가요. 남북 교류가 빨리 제대로 이뤄져서 거기 한번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경헌 교동면 실향민동우회장)

▲ 한국전쟁 이후 70여년간 금단의 구역, 닫힌 공간이었던 한강하구는 하나의 거대한 '경계'다. 강과 바다를 나누는 경계이자 남한과 북한이 맞닿는 경계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중심이 아닌 변방과 경계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한강하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민들이 중립수역 인근 교동도앞 해역에서 어업 활동을 하고 있다.
▲ 한국전쟁 이후 70여년간 금단의 구역, 닫힌 공간이었던 한강하구는 하나의 거대한 '경계'다. 강과 바다를 나누는 경계이자 남한과 북한이 맞닿는 경계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중심이 아닌 변방과 경계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한강하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민들이 중립수역 인근 교동도앞 해역에서 어업 활동을 하고 있다.

교동도 유일한 재래시장인 대룡시장. 이 곳은 실향민들의 고향 황해도 연백장과 닮았다. 과거와 현재, 남과 북이 어우러져 있는 대룡시장은 땅을 잃은 실향민들의 삶터이자 향수를 달래주는 소중한 공간이다.

휴전선에 총성이 멎은 지 68년. 이 68년 동안 대룡시장 한켠 상점을 지켜온 실향민 안순모(90) 할머니.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할머니는 대룡시장에서 지금껏 장사를 하고 있는 유일한 실향민 1세대다.

“스무살에 피난 나와서 지금 90살이야. 여기서 그냥 68년 동안 살았어. 이 가게에서 전부터 잡화 일절 화장품 그런거 판 거야. 가족은 (북한에서) 다 못 나와서 아버지, 11살 먹은 남동생, 7살 먹은 여동생 나 이렇게 넷이 나왔어. 1세대는 다 갔지. 시장에는 나 하나야. 2세들만 있어. 몇해 전에 우리 동생 환갑에 금강산을 구경시켜 주더라고. 갔었는데 38선 넘으니까 부모 생각이 문뜩 문뜩 나더라고.”

“(교동으로 피난 와서) 벽에다 분필로 썼데, 뿔뿔이 헤어졌으니까, 누구 몇일 날 여기서 있으면 만나자. 이렇게 된 게 이제 장마장이 시작된 거고요, 그러다보니까 처음에 노점으로 시작했데요. 그러다 조금씩 조금씩 땅을 세를 얻고 또 경제적인 부가 축적됨에 따라 사기도 하고 피난 나오신 분들이, 그래서 형성된 시장이에요.” (최성호 대룡시장 상인회장)

▲ 북측 주민들이 연안군 앞 갯벌에서 조업을 하고 있다. 해변에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기는 하지만 군인들의 감시는 없는 상태다.
▲ 북측 주민들이 연안군 앞 갯벌에서 조업을 하고 있다. 해변에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기는 하지만 군인들의 감시는 없는 상태다.

눈앞에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고향. 혹여 내 부모와 형제자매를 볼 수 있을까 그리운 마음에 실향민들은 교동도 북측 끝에 망향대를 세웠다.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에서 전쟁을 피해 목선을 타고 한강하구를 건너온 황래하(80) 할아버지. 곧 통일될 줄 알고 북쪽 땅 살림살이를 챙기러 두 딸과 먼저 강을 건넜던 어머니 뒷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놋그릇에 밥 담아서 제사 지내잖아요. 그걸 땅에다 묻어놓고 나왔다고, 그걸 캐서 정리한다고 딸 둘 데리고 들어가서 딱 스톱이 되고 만 거야. 그래서 지금도 내가 돌아가서 어머니가 제일 보고 싶고 어머니 얘기만 하면 항상 눈물이 나요. (교동 정착해서) 농사했죠. 돈도 그러니까 할 것도 마땅찮고. 배운 건 도둑질이라고 농사 말고 할 게 있나. 벼농사 밭농사 조금씩 했는데, 사는 게 참 한 세상 살기가 참 힘듭디다.”

▲ 강화군 곳곳에 설치된 몇 겹의 두터운 철조망이 강과 섬을 나눠 놓고 있다.
▲ 강화군 곳곳에 설치된 몇 겹의 두터운 철조망이 강과 섬을 나눠 놓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반도 중부 지방으로 들어가는 물길의 입구인 한강하구는 패권을 둘러싼 다양한 각축이 펼쳐진 긴장과 아픔의 공간이었다.

서해의 원류, 조상들의 강이란 뜻으로 '조강(祖江)'이란 불린 한강하구. 경계 지역의 설움이 아닌 남북통일 시대를 대비한 열린 공간으로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글 이창욱 기자 chuk@incheonilbo.com

/사진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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