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문화캠프에코뮤지엄-기지촌의 그늘 너머
1954 보산동 민가 풍경/사진제공=동두천시 30년사
1954 보산동 민가 풍경/사진제공=동두천시 30년사

삼팔선 아래 첫 남쪽 마을, 동두천.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건만 여기저기 흩어진 전쟁의 파편들은 비극으로 남아 숨통을 죄어온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 나라 그리고 대한민국의 변방 동두천에 세워진 미군 기지. 머지않아 그들에겐 무소불위의 힘이 주어졌고, 지역민들에겐 죽음이나 죽음보다 더한 삶을 감내해야 하는 시간들이 강요됐다.

20세기 한반도와 동아시아 냉전의 역사를 간직한 곳, 한반도 평화의 불씨가 되길 기원하며 '경기 북부 DMZ 에코뮤지엄' 그 두 번째 여정 '동두천 문화캠프 에코뮤지엄'으로 안내한다.

▲ 의정부~동두천 평화로변 정돈사업./사진제공=경기메모리
▲ 의정부~동두천 평화로변 정돈사업./사진제공=경기메모리

▲미국 대통령 방한 앞두고 반년만에 지어진 '3번국도(평화로) 연쇄상가'

미국 포드 대통령 방한에 따른 정비사업 목적으로 의정부와 동두천 간 3번 국도변에 지어진 건물이다. 1975년 3월 첫 삽을 뜨기 시작해 불과 6개월만인 9월까지 350동의 상가를 완공했다.

당시 동두천지방행정사에 따르면 정비사업에 참여했던 담당 공무원들은 가옥을 이축하는 과정에 있어 고충을 겪었다고 기록했다.

가옥 주민들이 쉽게 이축에 응하려 하지 않자 사업 담당자들은 친분이 있는 순서대로 주민들을 찾아 독려했다고 한다.

6개월여 만에 세운 350동의 상가들은 판잣집을 가리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쓰였다고 하며 18.5㎞에 이르는 도로변을 따라 지어졌다. 이 도로를 '평화로'라고 명칭하고 있다.

▲ 미7사단 정문~보산동 캠프케이시./사진제공=동두천 30년사
▲ 미7사단 정문~보산동 캠프케이시./사진제공=동두천 30년사

▲아직도 반환 못받은 미군헬기장 '캠프모빌'

캠프모빌은 캠프케이시 정문 앞 약 19만8347㎡(6만평)의 미군 헬기장(H220)을 말한다.

우리 정부는 활주로와 보급수용기지로 사용해 오던 캠프케이시의 기능이 다 하고도 10년이 넘어가면서 지속적으로 반환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미군은 정찰용 드론의 대체 활주로를 마련해줄 것을 요구하며 기지반환 약속을 계속해서 미뤄왔었다.

캠프케이시 일대는 신천이 휘어 흐르는 지형으로 홍수피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역이었는데 하천환경정비사업을 위해선 캠프케이시의 반환이 필수적이었다.

하천정비사업이 난관에 봉착하던 때 2018년 12월 SOFA 합동 위원회에 승인을 얻어 비로소 일부(약 1만5000평)정비사업이 가능해졌다. 나머지 약 4만5000평은 주한미군의 반환조건인 대체 비행장을 확보하지 못해 여전히 미반환 상태로 남아 있다.

특히 반환이 아닌 반환 전 기지 사용이므로 여전히 동두천시에서는 캠프모빌의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캠프모빌의 반환은 쇠락하는 원도심 활성화에 큰 역할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평화와 문화의 도시로 탈바꿈하는데 캠프모빌의 반환이 절실하다.

▲ 보산동 일대 그래피티.
▲ 보산동 일대 그래피티.

▲한국전쟁 이후 미군기지 주변에 형성된 마을 '보산동'

한국전쟁 이후 미군 주둔으로 미2사단 캠프케이시 정문 앞에 형성된 마을이다.

보산동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국적의 인종이 사는 다문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한 때 보산동은 황금기를 누리던 동두천의 중심지였다.

1967년 당시 보산동 26개 미군 전용 클럽이 일 년 간 벌어들인 외화가 약 40만 달러(현재기준 4억7496만원)에 이를 정도로 상당한 호황기를 누렸었다. 현재는 미군 부대들이 병력감축과 해외파병을 이유로 기지를 떠났고 실제 2만2000명에 달하던 병력은 3000여명 정도만 남게 됐다.

보산동 일대는 아직도 1970년대의 상점과 주거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70년대 보산동은 한국 안의 '작은 미국'으로 불리면서 상점의 주인과 종업원들은 영어를 주로 사용했고 미국적인 생활습관과 방식으로 살아왔다. 지금도 보산동의 음식점과 술집들에서는 미국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특수성을 고려해 경기도는 1990년 동두천을 외국인관광특구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후 경기문화재단과 경기도미술관은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5년부터 그래피티 아트 작업을 해 왔다.

K-POP 가수들의 뮤직비디오 촬영지나 언론매체에 소개되면서 보산동은 이색적인 문화관광명소로 알려졌다.

윤금이 사건 발생지.
윤금이 사건 발생지.

▲미군 기지촌 여성 '윤금이 피살사건' 발생지

1992년 10월28일 미군에 의해 발생한 한국인 여성 피살 사건이다.

동두천시 보산동 한 주택에서 이마를 둔기에 맞고 끔찍하게 피살됐는데, 용의자는 미 제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이었다.

피해자는 당시 주한 미군 기지촌 여성이었던 윤금이(26)씨로 자신의 살던 집에서 변을 당했다. 당시 마클 이병은 곧바로 한국 경찰에 검거됐으나 주한미군지위협정 규정상 미군 범죄 수사단에 인도됐다. 이토록 끔찍한 변태적 살인이 일어났지만 우리 경찰 측은 수사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 윤금이 피살 마클 일병 처벌 결의대회./사진제공=경기메모리
▲ 윤금이 피살 마클 일병 처벌 결의대회./사진제공=경기메모리

이에 시민단체들은 크게 반발하며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공동대응에 나섰다. 대책위는 사건의 용의자가 한국 경찰의 기초수사도 없이 미군 수사당국에 넘겨진 것에 항의하고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요구했다. 또 미군 범죄에 대한 수사권 확보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줄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1992년 11월6일 평택 미군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마클 이병을 넘겨받고 우리 재판부의 심판을 받게 됐다. 마클 이병은 반성의 기미 없이 범행 사실을 끝까지 부인해 왔지만, 그의 바지에서 피해자의 혈흔과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면서 진실이 드러났다. 1993년 12월16일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천안소년교도소에 수감돼 오다 잔여 형기를 1년여 앞둔 2006년 8월 가석방됐으며, 가석방 다음 날 곧장 미국으로 출국했다고 한다.

윤금이 사건은 SOFA 개정과 미군 범죄에 대한 국민의 인식 전환을 이뤘고 미군 범죄를 한국 법정에서 단죄하는 계기가 됐다.

▲ 양주군이 미군에게 임대준 외인아파트.
▲ 양주군이 미군에게 임대준 외인아파트.

▲30년째 방치 미군 임대 '외인아파트'

1974년 당시 양주군에서 미군에게 임대 주기 위해 지어진 3층 규모의 아파트다. 서울의 외인아파트와 같이 미국에서 직수입한 자재와 공법으로 건립됐고 주로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 등 36가구가 살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입주자들이 주변으로 빠져나가면서 폐쇄됐다. 30여 년째 방치된 외인아파트 자리에는 복합문화센터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복합문화센터에는 북카페, 아이사랑놀이터, 지역내 동아리가 활동할 수 있는 생활문화센터, 정보도서관, 급식 관리지원센터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 동두천 동광극장은 국내 유일하며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으로, ‘시그널’ 및 ‘응답하라 1988’ 등 드라마에도 자주 출연했다. 다른 영화관과 다르게 데스크에서 표를 팔며, 지정좌석제가 아니다. 옛날 극장처럼 과자와 음료수가 진열된 간이매점이 있다.
▲ 동두천 동광극장은 국내 유일하며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으로, ‘시그널’ 및 ‘응답하라 1988’ 등 드라마에도 자주 출연했다. 다른 영화관과 다르게 데스크에서 표를 팔며, 지정좌석제가 아니다. 옛날 극장처럼 과자와 음료수가 진열된 간이매점이 있다.

▲지은지 60년된 동광극장과 문화극장

1959년 문 연 동광극장은 600석의 단관극장으로 과거 극장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나훈아, 남진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무대에 서면서 당시 문화 공간으로도 역할 해 왔다. 동광극장은 한 방송의 배경으로 나오면서 '와칸다 극장'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문화극장<br>
▲문화극장

문화극장은 1964년 당시 양주문화원 원장이었던 송두영 원장이 건립했다. 케네디 초상화를 그린 것을 계기로 케네디 기념관과 예식장 등으로 운영돼 오다 1972년 문화극장이 됐다. 독특한 점은 극장 위로 봉화대가 설치돼 있는데 북녘에서 고생하는 북한 주민들에게 밝은 빛을 비춰 자유를 찾으라는 의미에서 '자유의 봉화대'를 세웠다고 한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매년 8월15일이면 봉화대에는 불이 밝혀졌다.

동두천에는 신영극장, 유한극장, 동광극장, 문화극장 등 4개의 극장이 있고 현재 문화극장과 동광극장에선 최신 영화들이 절찬리에 상영 중이다.

▲ 순댓국·만둣국 맛집 즐비한 중앙시장.
▲ 순댓국·만둣국 맛집 즐비한 중앙시장.

▲1960년대 조성된 동두천 시장 3곳

중앙시장은 1967년 동두천의 중심이 동두천동에서 생연동으로 이전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삼화의 조용호 사장이 시장을 개설해 운영해오다 1994년 대형화재로 중앙시장 대부분이 소실됐다. 무허가로 운영해오던 중앙시장은 2005년 동두천시가 전통시장으로 인정하면서 지금까지 활발하게 운영돼 오고 있다. 순댓국 거리, 만둣국 거리 등 맛집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품목을 만날 수 있다.

애신시장(양키시장).

애신시장(양키시장)은 1960년대 미2사단이 주둔하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미군 용품 매매시장이다. 1980년대부터 공산품수입이 자유로워 시장이 위축됐지만 미군 물품을 한 곳에서 구매할 수 있는 시장으로 독특한 감성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당시 풍요로운 미군에게서 흘러나온 미제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물건을 사려고 온 사람들로 시장은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미군복, 군화, 간이침대, 야전삽, 군용 식량 등 군용품부터 수입양주, 맥주, 초콜릿, 화장품 등을 팔고 있다.

큰시장은 1960년 조성된 동두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이다. 양주, 파주, 포천, 연천의 농산물을 물물 교환하면서 자연스럽게 개설됐다.

▲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곳으로 추정되는 상패동 공동묘지 입구에는 낡은 안내문이 풀 숲에 파묻혀 있다. 극빈층 내국인, 클럽 여성 종사자, 미군 혼혈 사생아 등 1050기 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60% 이상이 무연고 묘지다. 오랫동안 찾는 이가 없어 봉분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곳으로 추정되는 상패동 공동묘지 입구에는 낡은 안내문이 풀 숲에 파묻혀 있다. 극빈층 내국인, 클럽 여성 종사자, 미군 혼혈 사생아 등 1050기 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60% 이상이 무연고 묘지다. 오랫동안 찾는 이가 없어 봉분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60%이상 무연고 '상패동 공동묘지'

동두천시 관리의 자연 발생 공동묘지로 1050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60% 이상이 무연고 묘지다. 기지촌 여성들의 자조모임인 '민들레회'는 여성들이 죽으면 꽃상여를 메고 이곳 상패동 공동묘지에서 장례를 치렀다는 기억이 남아 있어 기지촌 여성들의 슬픔을 간직한 곳으로 불린다.

상패동 공동묘지 묘적부 기록에 의하면 1930년대 묘가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 강점기 때부터 형성된 곳임을 추정할 수 있다. 60~70년대 당시 인구 6만의 동두천시에서 20년 동안 매달 평균 적게는 1명 많게는 3명이 연고가 없거나 사망 후 연고를 찾더라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참고문헌=동두천을 찾고 잇다·동두천 30년사

/인천일보·경기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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