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문화캠프에코뮤지엄-전쟁의 파편들
▲ 노르웨이 야전 병원이 자리하던 장소.
▲ 노르웨이 야전 병원이 자리하던 장소.

한반도 분단의 상흔들이 여기저기 남아 폐부를 찌른다. 익어가는 곡식에 흐뭇해하고 피어나는 굴뚝 연기에 배가 불렀을 평화롭던 마을에는 막사가 산을 이루기 시작하더니 집채만 한 장갑차들이 들이닥쳤다. 지금도 제 땅인 양 높은 벽을 세운 미군기지에는 우리 영토임에도 발들이기 쉽지 않다.

20세기 한반도와 동아시아 냉전의 역사를 간직한 곳, 한반도 평화의 불씨가 되길 기원하며 '경기 북부 DMZ 에코뮤지엄' 그 첫 번째 여정 '동두천 문화캠프 에코뮤지엄'으로 안내한다.

▲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사진=슈트름케슈쯔의 밀리터리와 병기 블로그, 동두천을 찾고 잇다
▲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사진=슈트름케슈쯔의 밀리터리와 병기 블로그, 동두천을 찾고 잇다

▲노르매시(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

노르웨이 이동 외과병원은 1951년부터 1954년까지 한국 전쟁 기간 운영됐던 노르웨이의 야전 병원이다. 유엔 의료진의 일원으로 노르웨이 적십자가 운영하며 다친 군인을 치료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으나 민간인 치료도 맡아왔다.

1954년 11월까지 한국에서 9만여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르매시가 처음으로 설치된 지역은 의정부였다. 이후 동두천으로 옮겨졌고 현재 위치인 하봉암동 일대로 이전해 왔다.

노르매시에서는 하루 평균 8번, 최대 64번의 수술이 이뤄졌다고 한다. 의사들은 24시간 이상을 전방에서 후송된 부상병들을 끊임없이 수술했다. 노르웨이 야전 병원은 야전 병원의 모든 스태프의 자발적인 지원을 통해 지탱했다. 야전 병원 스태프들의 복무 기간은 6개월이었으나 전체 623명의 스태프 중 무려 100여 명 이상이 자발적으로 1년 이상 복무 기간을 연장했다고 한다.

노르웨이 야전병원이 문을 닫은 후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은 한국에 지속적인 의료지원을 위해 의료원을 구상했다. 3국의 의료진과 의료 비품, 시설지원으로 1958년 개원한 국립의료원은 1971년부터 한국이 단독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한국군 부대 소유로 돼 있다.

▲ 건물만 남아있는 성병관리소 전경.
▲ 건물만 남아있는 성병관리소 전경.

▲성병관리소

1971년부터 추진된 '기지촌 대책사업-기지촌정화사업'의 하나로 1973년 기지촌성매매여성들의 성병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동두천 소요산 일대에 6766㎡ 부지, 2층 규모로 세워졌고 '낙검자수용소', '몽키하우스', '언덕위의 하얀 집' 등으로 불렸다. 43만5000명이 성병 검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외국 군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젊은 외국 병사들의 성욕관리'가 주요 문제로 떠올랐다. 정부에서는 전투에서 지친 병사들을 위무하는 일이 전투력 유지의 관건이라 해석했다. 정부는 특정 장소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등록제를 실시하는 등 성매매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게 했다.

한국 정부는 미군의 일본행 성매매 수요를 국내로 돌리기 위한 방안으로 위안부들 대상 계몽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강연회에서는 성병 예방 교육, 미군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 성병관리소 내부.
▲ 성병관리소 내부.

기지촌의 본격적인 제도화와 공고화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이뤄졌다. 정부는 1962년 6월에 보사, 법무, 내무 3부 합동으로 국내 104개소에 특정 윤락 지역을 설치하고 윤락행위의 단속을 면제해주는 적선 지구로서 지정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위안부'를 '특수업태부'로 새롭게 호칭해 이들의 몸에 대한 효율적 통제와 관리 체계를 모색했다.

여성들이 정부 지정 장소에서 성매매할 수 있는 조건은 일주일에 한 번 일반 산부인과에 위탁을 준 성병진료소에 가서 검진을 받고 자신의 깨끗한 '몸'을 미군에게 제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1970년대 들어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외화벌이의 주요 자원과 국가 경제 성장의 발판으로 인식되자 이들을 '양공주', '민간 외교관', '경제건설을 위해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 몸을 바치는 애국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 위안부로 등록하지 않고 미군을 상대하다가 미군에게 적발되면 그 자리에서 낙검자수용소로 끌려가 성병이 완치될 때까지 페니실린을 맞아야 했다. 이러한 강제 치료 과정에서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수용소에서 도망치다 중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낙검자수용소는 지역별 차이가 있지만 30여년간 운영돼 오다 1996년 3월 폐쇄됐다.

▲ 아리랑 다리./사진=KTV 문화영화
▲ 아리랑 다리./사진=KTV 문화영화

▲아리랑 다리

동두천시 신흥중·고등학교와 개성집 중간지점에 있던 다리다. 1964년 미 7사단의 원조로 신천을 건널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인도전용 출렁다리였다. 다리가 없어 물이 적을 때는 돌다리를 이용했고, 물이 많을 때는 나룻배로 신천을 건너 생활하던 주민들과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위해 1956년 동두천에 주둔하고 있던 미7사단이 건설했다.

당시 아리랑 다리가 놓인 안흥리 일대는 안흥보육원(현 신흥간병요양원)과 신흥농업고등학교(현 신흥중고등학교)이 설립됐는데, 이 다리는 양 기관이 발전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 아리랑 다리가 사라지고 새로 놓인 안흥교.
▲ 아리랑 다리가 사라지고 새로 놓인 안흥교.

아리랑 다리의 명칭은 '춤추듯 출렁거리며 다닌다'고 해 붙여졌고 이 때문에 미7사단의 사단가는 아리랑이 됐다고 한다. 결국 차량은 물론 우마차도 다닐 수 없던 아리랑 다리는 자주 보수가 이뤄지면서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후에는 1972년과 2007년 각각 2차례 안흥교를 놓아 신천을 건널 수 있도록 조성했다.

▲ 캠프캐슬 반환 공여지에 세운 동양대학교.
▲ 캠프캐슬 반환 공여지에 세운 동양대학교.

▲Camp Castle 반환 공여지(동양대학교)

1953년부터 2015년(기지반환)까지 미2사단 공병대대와 보병대대가 사용하던 미군기지(동, 서, 북캐슬의 3곳의 기지)이다. 2008년 반환이 약속돼 있던 Camp Castle은 한미 간의 SOFA 반환 협상이 지연돼 오다 2015년 3월에 최종 반환됐다.

현재 전체기지의 20만4960㎡(6만2000여평) 중 15만5370㎡(4만7000여평)이 반환돼 동, 서 캐슬 지역으로 동양대학교가 들어오게 됐고 북캐슬의 일부는 미군기지 오염 토양 정화시설로 사용하고 있다. 4만9590㎡(1만5000여평)은 미반환으로 남아 있다.

차량정비고, 세차장, 유류저장시설로 사용됐고 반환과 함께 동, 서 캐슬에는 동양대학교가 설립됐다. 북캐슬은 2020년 현재 미반환구역이 있으며 캠프 캐슬의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는 시설이 있다. 동양대 자리는 과거 동두천공립보통학교(1923년 개교, 동두천초등학교의 전신)가 있던 교육의 터였다. 북캐슬 일부 지역에 정화시설이 가동 중이고, 미군기지 환경오염 정화를 우리 정부와 지자체가 떠안아야 하면서 문제점들이 지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 초창기 동두천역./사진=동두천시청
▲ 초창기 동두천역./사진=동두천시청

▲동두천역과 동두천1리, 2리

1912년 경원선 철도의 동두천역으로 최초 설립됐다. 1945년 해방으로 남한의 경원선 종착역 역할을 했다. 1983년에는 동안역으로 명칭 해오다 다시 2006년 동두천역으로 개칭됐다.

현재의 캠프케이시가 주둔한 동두천 1리와 2리는 이담면사무소와 시장이 있던 과거 동두천의 중심지여서 '원터'라고도 부른다.

원터에서 원은 조선 관리들이 출장 중에 사용하는 숙소를 뜻하며 공무로 출장하는 공무원들의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됐다. 고려 공민왕 때 원위전을 주조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착됐다. 세종 27년에는 원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 중에 한 사람을 뽑아 원주로 삼아 관리하게 했다.

경국대전의 의하면 동두천역 일대는 고려시대 이래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자리했다고 한다. 150여년 전에 원은 폐지됐고 원터라는 지명만이 남게 됐다.

▲ M48 전차를 수송하던 1972년 동두천역./사진=슈트름케슈쯔의 밀리터리와 병기 블로그, 동두천을 찾고 잇다
▲ M48 전차를 수송하던 1972년 동두천역./사진=슈트름케슈쯔의 밀리터리와 병기 블로그, 동두천을 찾고 잇다

동두천역은 3·1운동이 일어났던 현장이기도 했다. 동두천의 3·1운동은 양주군의 미금면 평내리 만세 시위로 시작됐다. 3월31일 진접면 부평리 시위까지 연인원 1000명, 시위횟수만 22회에 달했다. 양주군 16개 면 중 회천면과 은현면을 제외한 14개 면이 참여한 거국적인 만세운동이었다.

시위대는 적게는 13명에서 1300명에 이르는 대규모로 연일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0여 마을 주민 1300여 명은 일시에 동두천시장(캠프케이시의 연병장과 동두천1리)으로 집결했고 홍덕문이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등 행진을 이어갔다. 시위대는 현 동두천역에 이르러 정차한 열차를 향해 만세를 외치면서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기차를 타고 온 기마 헌병대는 역전에 대기하고 있다가 시위대가 다가오자 칼을 빼 들고 시위대를 저지하려고 필사적으로 발악했다. 시위대 선두에 섰던 박경필, 고복돌 등은 다가오는 일본 헌병이 탄 말의 다리를 몽둥이로 후려쳐 쓰러뜨렸다. 동두천의 3·1운동은 인근 면에 전해지면서 민족운동 확산의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다음화에 계속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참고문헌=동두천을 찾고, 잇다 (동두천역사문화연구회)

/인천일보·경기문화재단 공동기획



관련기사
[경기에코뮤지엄 평화를 담다⑩] 서로 생채기냈던 흔적, 이 강 너머 보듬어줄 날 오길 분단의 끝, 통일의 시작 파주. 그리고 DMZ. 얼어붙은 이 땅 위로 통일의 염원이 요동친다. 손 내밀면 닿을 듯, 북녘땅을 마주한 채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희망을 노래한다.20세기 한반도와 동아시아 냉전의 역사를 간직한 곳, 한반도 평화의 불씨가 되길 기원하며 ‘경기 북부 DMZ 에코뮤지엄’ 그 일곱 번째 여정 ‘파주평화캠프에코뮤지엄’으로 안내한다.▲판문점판문점은 정전협정(1953년 7월27일) 체결 이후 군사정전위원회의 원만한 운영을 위해 설치됐다.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공동경비구역을 [경기에코뮤지엄, 평화를 담다⑭] 지켜주세요…이 역사의 유산들을, 그 속에 싹튼 평화를 역사적 유물 또는 예술품, 그 밖에 학술 자료를 수집하거나 보존해 전시하는 공간을 두고 흔히 '박물관'이라 부른다. 역사박물관, 과학박물관, 민속박물관 등 수집 종류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제각각, 그러나 이 공간들이 가지는 목적이나 의미는 동일하다. 이 나라 대한민국의 미래 발전을 위해 과거 우리 선조들이 남긴 '지혜'를 답습하고 보존해 나가는 것.'경기에코뮤지엄'의 목적도 그랬다. 역사가 남겨 둔 소중한 보물들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 문화 건, 생태 건, 경기에코뮤지엄이 생겨난 이유도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