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코다 가마가 산 가브리엘호로 리스본을 떠난 것은 1497년 7월8일이었다. 후원자 돈주앙 2세 국왕의 사후였다. 그가 택한 코스는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게 아니라 북상하는 조류를 피해 우회하여 희망봉에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3개월간 육지는 커녕 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주모자를 처형하는 등 굳은 의지를 과시하면서 항해를 계속했다.
 마침내 일행은 11월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안의 여러 곳을 거치면서 다음해 5월20일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향료를 싣고 다음해 9월 리스본에 귀환했다. 캘커타를 왕복하는데 2년2개월이 걸린 셈이며 그동안 170명의 선원중 3분의 2를 잃었다. 이를 역사는 바스코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이라 기록한다.
 그러나 희망봉의 발견은 그보다 이전인 1488년 역시 포르투갈의 항해자 디아스에 의해서였다. 그 이전해 말 두척으로 출범 아프리카 서안으로 남하중 폭풍으로 13일간을 표류 선원들의 반대로 되돌아 가다 지금의 케이프타운 남쪽끝 케이프포인트를 바라보고 폭풍의 곶이라 명명했다. 그후 바스코다 가마가 그곳을 통과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기 때문에 국왕이 희망봉이라 했다.
 희망봉이란 이름은 물론 이의 발견으로 유럽과 인도를 잇는 항로를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방으로 향하는 통로가 막혀 아프리카를 우회하려 했으나 아무리 해안을 따라 남하해도 끝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바닷길이 열리는 희망봉이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희망봉이라는 명명도 국왕이 아니라 디아스 자신이 했다는 사료도 있다. 그곳은 험한 날씨와 거친 앞바다로 유명하다. 인도양에서 흘러오는 모잠비크-아굴라스 난류와 남극해에서 오는 벵겔라 한류가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인천항 개항 이래 처음으로 희망봉 뱃길이 열렸다고 한다. 싱가포르의 최대 민영선사에 의해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을 잇는 항로개설 취항식이 지난 1일 있었다. 인천항의 활황을 여는 희망의 뱃길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