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평 미군기지 캠프마켓 내 일본육군 조병창 병원 건물 존치 여부를 두고 논쟁이 일고 있다. 지난 20일부터 철거하려던 병원 건물을 인천시가 문화재청의 건물 보존 요청을 받고 급히 철거 유보를 결정해 다행히 한숨은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병원 건물 철거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다.

국방부가 미군으로부터 반환받은 캠프마켓은 우선 기지 내 유류 등에 오염된 토양을 정화한 뒤, 다시 인천시가 양도받아 활용할 예정이다. 그런데 국방부는 캠프마켓을 정화하는데 조병창 병원 건물로 어려움이 있다며 인천시에 병원 건물 존치 여부를 물었는데, 캠프마켓 시민참여위원회가 지난 6월17일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인천시는 위원회의 의견을 첨부하여 국방부에 철거 의견을 보냈는데, 이를 알게 된 인천지역 내 전문가와 시민단체들이 병원 건물 존치를 주장했고 문화재청이 이를 받아 인천시와 국방부에 건물 보존을 권고한 것이다.

조병창 병원 건물은 일제가 1939년 부평에 조병창을 설치하면서 세운 부속 건물이다. 조병창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일제는 1만명 이상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소총, 총검, 탄환, 포탄, 군도 등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작업하다 부상을 입어 치료하던 곳이 조병창 병원이다. 따라서 조병창 병원 건물은 일제가 아시아와 태평양 전쟁을 벌일 때 총과 탄환을 만들어 보급한 전쟁기지의 증거이고 흔적이다.

최근 일제가 패전을 앞두고 작성한 '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이라는 일본군 극비문서가 발견되었는데(경향신문 8월7일자),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부평 조병창을 지하화하고 일본 도쿄에 있는 제1조병창을 부평으로 옮겨 전쟁을 계속하면서 일본 본토에 집중된 미군 폭격을 한반도로 분산해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정말 끔찍한 일이다. 이같은 계획이 실행되기 전에 일본이 패망했기 망정이지 자칫 한반도가 일본의 총알받이로 미군의 집중된 폭격대상이 될 뻔했다.

부평 조병창은 일제가 1939년 부평 백마장 넓은 들판에 매우 큰 규모로 지은 군사시설이다. 부평에 제1제조소, 평양에 제2제조소가 있었고, 부평에는 1공장 주물공장, 2공장 선반공장, 3공장 조립공장이 있어, 매달 99식소총 4000정, 총검 2만개, 소총탄환 70만발, 포탄 3만발, 군도 2만개 외에도 수백대의 차량과 수백척의 배, 무전기 등을 만들었던 그야말로 일제의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핵심 군사기지였다. 1942년 말 현재 조병창 관련 공장에서 병기를 만드는데 사용한 선반기계가 6500대에 달했다고 하니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제는 부평 조병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모집, 관 알선, 징용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강제동원하였는데, 특히 태평양전쟁 이후 국내에서 강제동원된 대표적인 사례가 부평 조병창이다. 국외 강제징용을 피해 지원하거나, 정신대 동원을 피해 지원하거나, 학교에서 단체로 지원하기도 했는데 전국에서 1만명 이상 되었다. 당시 일제는 조선병참기지화 정책을 내세워 한반도를 만주와 중국, 태평양 전쟁의 전진지기로 삼았는데, 부평 조병창이 그 핵심 기지였다.

지금 부평 캠프마켓에 남아 있는 조병창 병원 건물은 원래 조병창 부지의 중앙에 자리잡은 매우 큰 건물인데, 한국전쟁 때 가운데 부분이 폭격을 맞아 부서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일제 때 이 병원은 내과·외과·안과·이비인후과·피부과·치과 등이 있는 큰 병원으로 조병창 공장과 더불어 대표적인 일제의 전쟁 잔재이다. 그런데도 이번에 인천시에서 부평 캠프마켓 내 존치 시설물로 조병창 주물공장 건물과 굴뚝, 일제가 전국 각지에서 수탈한 쇠붙이·놋그릇·엽전 등을 실어오던 철로와 플랫폼만 남겨두고 조병창 병원 건물을 철거하려고 했으니 재고해야 한다.

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라 한반도를 전쟁기지로 만들고 조선인을 총알받이로 사용하려 했던 침략전쟁의 실상을 알려주는 증거요 흔적인 부평 조병창 병원 건물은 반드시 존치되어 일제의 침략전쟁 만행을 알리는 표지가 돼야 할 것이다.

 

/김재용 변호사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