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 앞바다 1976년부터 40여년 조사
신안선·동전 800만개 등 문화재 인양
태안 일대선 마도선 등 선박 5척 발굴
고려청자·목간 비롯한 유물들 쏟아져
두꺼비 청자 벼루 포함 5점 보물 지정
섬업벌서 찾은 8~9세기 선박 영흥도선
한·중·일 잇는 국제 무역선일 가능성도
황해 곳곳에서 해저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전남 신안선 발굴 이후 완도와 진도, 군산, 태안, 대부도, 영흥도 등 서남해안 일대 바닷속에서 짧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천 년이 넘는 시간을 뚫고 고선박들이 나오고 있다. 선박과 함께 도자기와 금제품, 동전, 목재 등 각종 유물도 쏟아지고 있다.
현재까지 서남해안에서는 20여곳의 해저유적지에서 14척의 난파선을 비롯해 10만 점이 넘는 유물이 발굴됐다. 주요 해저유물 발굴지로는 전남 신안과 충남 태안, 그리고 인천 앞바다를 꼽을 수 있다.
국내 해저유물 역사의 시작 신안 앞바다
신안군 앞바다는 수중발굴 역사의 시작인 신안선을 비롯해 달리도선과 안좌도선 등이 발굴됐다.
지난 6월 신안선이 전시된 목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을 찾았다. 여전히 그 웅장함에 압도된다. 2층 높이의 전시관에 자리 잡은 신안선 주변으로는 당시 선적된 화물들도 그 위치 그대로 전시돼 있다.
1984년 인양 당시 선체는 길이 24.2m, 너비 9.15m에 달했다. 상판까지 복원할 경우 길이 약 34m, 최대 폭 약 11m, 높이 8m이고 중량은 200t 정도로 추정된다.
신안선은 1323년 중국 저장성 경원(닝보)에서 일본 하카타(후쿠오카)로 향하던 배로 전남 신안 증도 앞바다에 침몰했다. 1976년부터 지금까지 40년 이상 수중발굴 작업을 벌여 도자기와 동전, 금속 공예품, 칠기, 자단목 등이 실려 있었다. 유물 2만4000여 점과 28t 무게의 동전 800만 개가 나왔다.
신안선이 최초로 발견된 신안 증도 앞바다를 찾았다. 마침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700년 전 신안선이 이곳을 지날 때도 오늘과 같이 거센 파도와 바람이 몰아쳤으리라. 저 멀리 해안선 가까이에 부표하나가 떠 있다. 그 일대가 바로 신안선이 발굴된 장소다.
신안선 발굴 4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다.
중국 남부에서 일본을 향하던 원나라 국제 무역선이 왜 이곳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할 것일까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는 일본으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신안 앞바다로 떠밀려와 침몰했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져 왔다.
최근 연구는 한·중·일을 잇는 항로를 운항하던 국제 무역선이 신안 앞바다에서 좌초했다는 가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국 남부에서 출발해 한반도 강진 일대의 고려청자를 싣고 일본으로 향하던 국제 무역선이라고 설명한다.
김병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술연구관은 “신안선은 오늘날의 한국 수중발굴 역사의 시작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위대한 발굴”이라면서 “기존 학설에서 벗어나 이제는 신안선을 한·중·일을 잇는 국제 무역선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도자기 역사를 다시 쓴 태안 앞바다
태안 일대에서는 발굴된 선박은 태안선을 비롯해 마도 1, 2, 3, 4호선까지 5척이나 된다. 함께 올라온 도자기만 수만점이 넘는다. 목포에만 있던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을 태안에 추가로 건립한 이유이기도 하다.
태안 마도 일대는 수많은 배가 침몰한 곳이기에 한국의 '버뮤다 삼각지대'로, 더불어 수많은 해저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바다의 경주'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살짝 가랑비가 내리는 날 찾은 태안전시관은 몇 년 전과는 달리 전시 유물들로 가득했다. 특히 마도선을 그대로 재현한 전시관은 당시 현장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도자기는 탄성을 지르기에 충분하다.
2007년 발굴된 태안선은 무려 2만5000여 점이나 되는 고려청자와 목간이 쏟아졌다.
2009년에는 한 해에만 마도 1, 2, 3호선을 찾아냈다. 먼저 마도 1호선부터 발굴 작업을 시작해 청자 300여 점, 목간, 죽찰, 도기, 금속 등 872점이 유물이 나왔다.
2010년 발굴한 마도 2호선에서는 청자 접시와 매병 파편이 나왔다. 발굴된 청자만 180여 점이었다. 2011년 발굴한 마도 3호선에서는 청자와 목간, 도기 등 250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다른 배들과는 달리 마도 3호선은 배 형태가 잘 남아 있어 통째로 인양하기로 결정했지만, 여전히 바닷속에 그대로 있다. 길이 12m, 너비 8m, 깊이 2.5m의 선박을 넣을 수 있는 보존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4년 확인된 마도 4호선은 현재까지 발견된 배 중 유일한 조선 시대 배다.
특이 마도 인근에서 발굴된 수중유물 중 5점은 우리나라 수중문화재로서는 처음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두꺼비 모양의 청자 벼루와 음각과 상감으로 장식된 청자 매병 2점, 죽찰 2점이다.
마지막 남은 해저유물의 천국 인천 앞바다
인천 앞바다에서 해저유물 발견 가능성이 높은 곳은 영흥도 인근 지역과 강화 교동 지역 등 2곳이 꼽히고 있다.
우선 현재 인천 해저유물 발굴의 중심지는 영흥도다. 영흥도와 자월도 사이 섬업벌에서 발굴된 영흥도선은 해상왕 장보고가 한·중·일을 잇는 활발한 국제교역활동을 벌이던 8∼9세기 통일신라 시대 선박이다. 국내 바다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배이다. 하지만 선박의 성격을 두고 관련 학계가 지금까지도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 학계에서는 평저형의 전형적인 한선(韓船)의 모양으로 서해안 일대를 다니던 연안 무역선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준첨저형의 독특한 선형의 황칠과 같은 귀한 무역품을 싣고 다니던 국제 무역선일 가능성도 높다고 보고 있다. 후자의 경우 통일신라 시대 장보고 선단의 선박일 가능성도 높기에 인천 영흥도선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논란에 대해 강원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은 “발굴 당시 독특한 선형으로 주목받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연구 결과로는 기존 한선의 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처럼 인천을 대표하는 유물이지만 복원작업은 여전히 요원하다. 현재 발굴된 선체는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보관돼 있다. 2013년부터 물속에 넣어 염분과 철분을 빼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 작업만 최소 10년이 걸린다.
탈염 처리가 끝나면 다시 딱딱하게 만드는 경화 처리를 해야 한다. 나무가 무르면 부서지기 때문이다. 경화 처리 후 건조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 과정도 2~3년이 걸린다.
보존 처리를 담당하고 있는 윤용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주무관은 “선박 목재에 철제 솥이 부식된 철 성분이 많이 침투하면서 항산화돼 목재 성분이 거의 날아갔는데 이를 어떻게 제거해야 할지 고민거리”라며 “더구나 복원 작업을 한다고 해도 복원 장소가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영흥도와 인접한 대이작도에서도 수중유물 발굴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인천일보 취재팀이 발견한 도자기의 경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감정 결과 원나라 시대 도자기로 판명됐다. 대이작도 풀등 인근에서 발견된 이 도자기로 인해 주변 지역 정밀 발굴조사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여전히 미지의 장소로 남은 곳이 바로 강화도 일대 한강하구 지역이다. 이 지역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수많은 선박이 침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국내 해저유물 인양기술이 1970년대 신안선 발굴로 시작됐다는 점과 한강하구 남북 접경 지역은 그동안 단 한 차례로 조사활동을 벌이지 못한 점을 고려하면 해저유물 발굴 가능성은 매우 높다. 향후 남북 공동으로 이들 지역에 대한 수중발굴 작업을 기대해본다.
제주 해저유물 탐사 현장을 가다
3m 잠수 1시간여 만에 송대 도자기 조각 찾아
현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한창 발굴 작업을 진행 중인 제주 신창리 앞바다 현장을 찾았다.
신창리 포구에서 연구소 해저유물조사팀의 소형 고무모터를 타고 수중발굴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굴 현장 수심이 얕아 연구소의 전용 발굴조사선은 먼 바다에 정박해 있었고, 현장에는 중형 고무보트에 탄 점수부들이 거친 파도와 싸우며 수중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파도를 헤치고 접근한 현장의 모습은 생동감 넘쳤다.
1983년 금제 유물이 처음 발견된 이 해역에선 2019년 첫 발굴조사 당시 중국 남송시대 도자기와 함께 '삼가 봉한다'는 뜻의 '謹封(근봉)'이란 글자가 새겨진 목제 인장이 발굴됐다.
물 속에 잠들어 있던 '보물선'을 깨우는 작업은 2019년 시작해 현재 5차 발굴이 진행 중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조사원들은 공기를 공급하는 호스가 연결된 잠수복을 입고 교대로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옆사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모터 소리가 시끄럽다. 바로 바닥의 모래를 빨아들이는 장치를 돌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지난 후 수심 3m에서 1시간이 넘는 발굴 작업을 마치고 올라온 잠수부의 손에 송나라 시대 명문이 선명한 도자기 한점이 쥐어져 있었다.
이날 작업에서도 수십여 점의 송나라 시대 도자기 파편이 발굴됐다. 발굴 작업에 방해될까 1시간 남짓 취재를 마치고 뭍으로 돌아왔다.
현장을 담당하고 있는 허문녕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제주 바다는 수심이 3m에 불과하지만 너울이 심해서 숙련자도 멀미를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다”면서 “이번 신창리 해저유물 발굴을 통해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제주도가 한·중·일을 잇는 고대 해상항로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이곳에서 수습된 유물 일부는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인천일보 황해로드특별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허우범 박사 appolo21@hanmail.net
신춘호 박사 docu888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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