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깔아놓고 겁낸 적이 없네요”


2001년 'Na' 에 기고하며 만화가로 첫발
2008~2010년 네이버 웹툰 'TLT'로 인기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서 선보였던
라이브 드로잉으로 현대미술계 스타 등극

내달 11일까지 서울 롯데뮤지엄서 기획전
10m 백지에 즉석 그림 '드로잉 나우' 펼쳐

“위안부 관련 프로젝트 가장 기억에 남아
백지 앞서 주저하게 될 때 오면 은퇴할 것”
▲ 김정기 작가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작품 앞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김정기 인스타그램
▲ 김정기 작가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작품 앞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김정기 인스타그램

밑그림 없이 '쓱쓱' 펜 한 자루가 쥐어졌을 뿐인데 거칠 것 없는 손놀림으로 백지 위를 순식간에 채워간다. 그는 백지가 두렵지 않다. 백지는 곧 그의 무대이자 놀이터가 된다.

기억 속 이미지를 완벽한 테크닉과 탄탄한 서사 구조로 표현하는 '라이브 드로잉' 장르를 탄생시킨 세계적인 아티스트 김정기. 그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세상 속으로 안내한다.

김정기, The Other Side 포스터. /사진제공=롯데뮤지엄

#40년 그림 인생, 디아더사이드

마블 '시빌 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 블리자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격전의 아제로스' 등 이름만으로도 흥미진진 해지는 미술 작업에는 김정기의 이름이 등장한다.

김정기 작가는 광고, 미디어, 패션 등 전방위적인 분야에서 펜 하나로 현대미술의 저변을 확대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려오고 있다. 덕분에 국내보다 해외 무대에서 더 유명세를 타고 있는 김 작가는 모처럼 국내 무대에서 전시를 열고 있다.

그는 지난 4월16일 시작으로 다음 달 11일까지 서울 롯데뮤지엄에서 대규모 기획전 '김정기, 디아더사이드'를 열고 만화, 드로잉, 회화, 영상, 사진 작품 등 200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또 그의 이름을 알린 1등 공신 라이브 드로잉쇼를 직접 볼 기회도 제공된다.

“일주일에 4일 정도는 전시장을 찾고 있습니다. 매회 10m의 백지 위로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가는 '드로잉 나우'를 스트리밍하고 있기도 하죠. 이번 전시 디아더스 사이드는 저의 40년 그림 인생을 총망라한 전시이기도 합니다. 고등학교 때 그렸던 저의 초창기 작품들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의 상상 속 세계들의 실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시공간을 오가며 나타나는 탄탄한 서사구조가 관객들에게 흥미를 끌어내고 있다.

▲ 김정기 작 'Heading towards a Future Somewhere'./사진제공=롯데뮤지엄
▲ 김정기 작 'Heading towards a Future Somewhere'./사진제공=롯데뮤지엄

#세상을 놀라게 한 드로잉

김정기 작가의 등장은 세상 사람들의 눈을 의심케 했다. 2011년 당시 부천국제만화축제에 참여하면서 밑그림 하나 없이 부스 전면을 메운 드로잉 영상이 화제가 됐다. 김 작가는 타고난 관찰력과 묘사력으로 오로지 머릿속에 구축된 데이터에 기반을 둔 그림을 그려냈다. 이런 그의 독보적인 천재성이 인정받으면서 일약 현대미술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능력이 좋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계속 그림을 그리다 보니 사물을 재현해 내는 능력과 사물의 특징을 보는 것이 훈련이 됐습니다.”

김 작가가 만화가의 꿈을 키운 건 스케치북을 선물 받았던 여섯 살 때부터다. 표지에 그려진 만화 '닥터슬럼프'가 너무 예뻐서 그림에 빠졌다고. 2001년 KTF의 간행물 'Na'를 시작으로 2002년 '영점프'를 통해 '퍼니퍼니'를 연재하며 만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연재된 네이버 웹툰 'TLT'가 김정기의 뛰어난 그림 실력과 탄탄한 스토리로 마니아층을 확보하면서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다.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선보인 파격적인 라이브 드로잉을 기점으로 중국, 유럽 등 국제무대로 진출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됐다.

특히 2016년 SK이노베이션 Big Picture of Innovation편 광고를 통해 대중적으로 작품을 알리게 됐고 마블, 베르나르 베르베르, 드렁큰 타이거, SM엔터테인먼트 등 현대미술과 상업미술 사이에서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프로젝트로 눈길을 끌었다.

“SK이노베이션 광고 역시 저에겐 좋은 기회였고 많은 프로젝트를 해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위안부 관련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입니다. 앙굴렘 만화전시를 통해 선보인 위안부 관련 전시를 준비하면서 많은 부분이 조심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마치 숙제 검사를 받듯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 썼던 기억이 납니다.”

#일할 때 그리는 그림, 쉬면서 그리는 그림

김정기 작가의 또 다른 이름은 입시 미술 만화계 대부다. 입시 미술 학원에 몸담으며 제자들을 양성해 온 전력이 있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 입시 미술에 대한 여타 예술과들이 갖는 부정적인 시각과는 조금은 다른 시각들이 엿보인다.

“입시 미술에 20년 가까이 몸담았죠. 제 생각은 그래요. 입시 미술이라 하면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경우가 대부분인 듯싶더라고요. 음악이나 체육을 보면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희한하게 미술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미술학원이 획일화된 생각을 갖게 한다는 우려 때문이라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미술의 기본기를 배울 수 있는 기관이면서 유일한 시기가 입시 미술뿐이라는 거죠. 저 역시 그림의 기본기를 미술학원에서 익히고 다졌기에 이러한 부분에서 입시 미술이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평균 5시간 내지 6시간은 한번 자리에 앉으면 펜을 놓지 않는다는 김 작가. 그에게 드로잉은 일상이자 숨을 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직도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일이 설레고 즐겁단다.

“저는 별다른 취미가 없어요. 일할 때도 그림을 그리고 쉴 때도 그림을 그리죠. 저는 그림을 가장 재밌게 그렸던 사람으로 또 가장 그림을 쉽게 그렸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그만큼 재밌는 게 중요하단 얘기죠. 저는 백지 앞에서 주저하게 될 때가 오면 은퇴할 겁니다. 다행히 아직은 백지를 깔아놓고 겁내본 적이 없네요.”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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