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의>, 우리나라 사람은 아교와 옻 같은 속된 꺼풀이 덮여 있다.
서얼이라는 굴레 너머 부국안민의 꿈을 품다
▲ 청나라 화가인 나빙(羅聘, 1733~1799)이 그린 박제가 초상 사진. 군관 복장 차림인 이 초상은 청나라 화가 나빙이 그렸다. 원본은 일본 후지즈카 교수가 소장하고 있다가 일제 말기 도쿄 공습 때 소실되었고 아래 사진만 남았다. 서얼로서 선생의 삶도 그러했지만, 초상화마저도 저러하니 이래저래 기구한 삶이다. 선생은 눈동자가 녹색이라 스스로 녹동백이(綠瞳白耳)라 칭했으며 아버지 키를 그대로 물려받아 매우 작았지만, 몸집은 단단ㅋ다. 같은 서얼이며 사검서 중 한 명인 벗 유득공(柳得恭)은 키가 작은 선생을 '땅딸보'라 놀렸으며 “세 치 혀를 놀리면 네 마리 말로도 못 좇아온다”고 그 달변을 추켜세웠다. 이 그림은 1790년 8월18일에 그려졌다. 선생이 두 번째 연행에서 만난 나빙이 선생과 이별을 아쉬워하며 선물한 초상이다. 나빙은 초상화 옆면에 “이제부턴 제 아무리 멋진 선비 보더라도 냉담하리. 이별하려 하니 너무도 마음이 슬퍼지누나.(從今冷淡看佳士 唯有離情最愴神)”라 써놓다. 두 사람 간 별의 정한이 꽤 깊음을 알 수 있다.
▲ 청나라 화가인 나빙(羅聘, 1733~1799)이 그린 박제가 초상 사진. 군관 복장 차림인 이 초상은 청나라 화가 나빙이 그렸다. 원본은 일본 후지즈카 교수가 소장하고 있다가 일제 말기 도쿄 공습 때 소실되었고 아래 사진만 남았다. 서얼로서 선생의 삶도 그러했지만, 초상화마저도 저러하니 이래저래 기구한 삶이다. 선생은 눈동자가 녹색이라 스스로 녹동백이(綠瞳白耳)라 칭했으며 아버지 키를 그대로 물려받아 매우 작았지만, 몸집은 단단ㅋ다. 같은 서얼이며 사검서 중 한 명인 벗 유득공(柳得恭)은 키가 작은 선생을 '땅딸보'라 놀렸으며 “세 치 혀를 놀리면 네 마리 말로도 못 좇아온다”고 그 달변을 추켜세웠다. 이 그림은 1790년 8월18일에 그려졌다. 선생이 두 번째 연행에서 만난 나빙이 선생과 이별을 아쉬워하며 선물한 초상이다. 나빙은 초상화 옆면에 “이제부턴 제 아무리 멋진 선비 보더라도 냉담하리. 이별하려 하니 너무도 마음이 슬퍼지누나.(從今冷淡看佳士 唯有離情最愴神)”라 써놓다. 두 사람 간 별의 정한이 꽤 깊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올해로 회갑이니 꼭 이 땅에서 60년을 살았다.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내 인생길을 이 땅에서 잘 걷고 있나? 저들이 꿈꾼 세상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살고 있나.' 적다고도 많다고도 할 수 없는 밥숟가락이지만, 셈 치자면 저 초정 선생보다 5년을 더 살았다. 1778년(정조 2) 청나라 풍속과 제도를 보고 돌아와 <북학의>를 쓴 선생 나이 스물아홉으로 따지자면 무려 30년을 더 살았고, 시대로 헤아리면 23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는다.

21세기 현대 과학은 지구와 달의 거리인 평균 38만㎞보다 200배 정도 먼 태양계에서 4번째 궤도를 돌고 있는 화성에 탐사선을 보냈다. 무려 7800만㎞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지구촌이 코로나19라는 후진적 전염병으로 2년째 몸살을 앓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대, '왜 필자는 이백 년 전 스물아홉의 조선 서생이 쓴 <북학의>를 굳이 읽느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선명하다. 저 시절, 저 선생의 삶에서 당대의 고식화된 문화적 편견과 선입견, 강고하고 배타적인 학문의 가두리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실학을 보았기 때문이다.

선생의 자(字)는 차수(次修), 초명은 제운(齊雲), 호는 정유(貞蕤)·초정(楚亭)·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정유라는 호는 '곧게 똬리를 틀다'라는 뜻으로 소나무의 별칭인데 자못 의미가 있다. 다. 선생의 집이 한때 서울 종로구 연건동의 동쪽, 이화동의 서쪽 사이에 있던 장경교 인근에 있었다. 그곳에 소나무 한 그루가 빼어나 가지가 굽어 똬리를 틀었다. 정조가 이를 보고는 아끼어 '어애송'(御愛松, 임금님이 사랑하는 소나무)이란 이름이 붙었다. 선생은 자신을 아끼는 정조를 생각하며 이 정유를 호로 삼은 것이다. '진랭원 어애송가'(眞冷園御愛松歌)라는 시도 정조와 살가분한 정을 담은 작품이다.

선생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당파는 남인이다. 부친은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朴坪)으로 부인이 사망하자 서얼인 김씨를 얻어 선생을 낳았다. 11세인 1760년 아버지가 사망하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남산 아래 필동과 묵동을 전전하였는데 이 남산골이 흥미롭다. 당시 남산에 사는 선비들을 헛가리 선비라고 하였다. 헛가리는 널빤지, 나뭇가지, 짚 등으로 얼기설기 엮은 형편없는 집이다. 남산골에 사는 선비들의 가난함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가난하여 신조차 없어서 마른날에도 나막신을 신는 딸깍발이들이었지만 지조만은 팔지 않았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훈련대장 이완에게 칼을 들이대는 허생도 이곳에서 살았다. 그래 이들의 기개가 조정까지 미치기에 “남산골 샌님 원(수령) 하나 못 내도 당상(堂上, 정3품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 목은 잘도 자른다”는 말까지 있었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반정균 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돌아온 뒤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북학의> 내·외편을 저술하였다. 내편에서는 생활도구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이 때 선생의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정조가 1777년에 서얼허통절목을 발표하고, 이듬해 1779년 규장각에 검서관직을 설치하여 선생을 비롯한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 서얼 출신 학자들을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하였다. 이 넷은 사검서(四檢書)라 불렸다. 검서란 규장각(奎章閣, 왕실 도서관)에서 서책을 교정하거나 원본과 똑같이 베끼는 일을 맡아보던 검서청(檢書廳) 소속 하위 임시직이니 대단한 직책이 아니다. 이후 선생은 승문원 이문학관(承文院 吏文學官)을 겸임하였으며, 13년간 규장각 내·외직에 근무하면서 여기에 비장된 서적들을 읽고, 정조를 비롯한 국내 저명한 학자들과 깊이 사귀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하고 간행하였다. 박지원의 제자였던 선생은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으며 달변이었다.

1786년 왕명으로 당시 관리들의 시폐를 시정할 수 있는 '구폐책'을 상소로 올린다. 신분을 타파하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게 급선무라고 주장하였다.

1790년 건륭제 팔순절에 정사 황인점을 따라 두 번째 연행길에 오른다. 돌아오는 길에 선생은 압록강에서 다시 왕명을 받아 연경에 파견되었다. 원자(뒷날 순조)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정조가 한낱 검서관이었던 그를 정3품 군기시정에 임시로 임명하여 별자사절로서 보낸 것이다.

1792년 검서관을 사직하고 부여현감으로 부임한다. 1793년 정원에서 내각관문을 받고 '비옥희음송'이라는 비속한 문체를 쓰는 데 대한 자송문을 왕에게 지어 바쳤다. 1794년 춘당대무과에 급제하여 정3품 가량 벼슬인 오위장(五衛將)이 된다. 1798년 선생은 <북학의>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응지농정소'를 올렸다. <소진본북학의>는 이때 작성되었다.

1801년(순조 1)에는 사은사 윤행임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네 번째 연행길에 올랐으나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 흉서 사건(윤가기와 임시발이 세상을 개탄하는 담화를 쓰고 당시 재상이었던 심환지 일당의 행동을 꾸짖자 대역죄로 처단한 사건을 말한다)의 주모자인 윤가기(尹可基)와 사돈이라는 이유로 혐의를 받고 종성에 유배되었다.

1805년 3월 유배에서 풀려나 4월25일, 56세로 조선후기 한많은 서얼로서의 삶을 마쳤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