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지진을 점령한 미 해병대가 촬영한 승전기념 사진(사진 중앙의 미 해병이 왼쪽 발로 밟고 있는 것은 조선 병사의 시신이다) /사진제공=생명평화포럼
▲ 초지진을 점령한 미 해병대가 촬영한 승전기념 사진(사진 중앙의 미 해병이 왼쪽 발로 밟고 있는 것은 조선 병사의 시신이다)/사진제공=생명평화포럼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는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왕검을 모시는 '참성단'이 자리 잡고 있다. 전국체전의 성화도 이곳에서 채화한다. 길상면 정족산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이 있다.

고려 창건 이후 조선조를 잇는 1100여 년간의 장구한 세월 동안에는 한민족 수도의 관문 역할을 맡아왔다. 고려 수도 개성으로 들어가는 초입새였고, 조선 수도 한양의 물길인 한강과 바다가 연결되는 지점이다.

지리적 군사적 요충인 강화도를 둘러싼 국내외 세력 간 다툼도 치열했다. 고구려 때는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격파한 관미성 전투가 강화 교동도에서 벌어졌다.

고려에 들어서는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아예 수도를 강화로 옮겼다. 무신정권이 항복을 한 뒤, 최후까지 항전을 벌인 삼별초군의 출발지도 강화도다. 조선 인조 때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두 차례나 왕실의 피난처로 이용됐다.

 

제국주의 침탈, 6·25 전쟁과 강화도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또한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구실삼은 프랑스군의 병인양요, 미군이 잔인하게 조선군을 집단 학살한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에 이은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등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이후에도 강화군민들의 고난은 그치지 않았다. 6.25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군의 지원을 받은 조직에 의해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는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1기 활동을 통해 밝혀져 일부 내용이 공개됐지만 더 이상 추가조사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이 당시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사망자들이 원혼을 위로할 위령시설도 조악한 입간판 몇 개와 묘지 터 이외에는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인천의 전쟁과 평화로 가는 길' 강좌 개최

강화도에서 벌어진 전란 중 서양 제국과 첫 조우한 '병인·신미양요'를 되돌아보는 강연이 지난 21일 오후 여행인문학 도서관 '길위의 꿈'에서 개최됐다.

생명평화포럼(상임대표·정세일)은 이날 '인천의 전쟁과 평화로 가는 길' 평화 강좌 첫 번째 순서로 강화 역사 전문가인 이경수 전 양곡고등학교 역사교사를 강사로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2021년 인천시평화도시조성' 공모사업으로 진행된 이 행사는 '근대도시 인천이 겪었던 전쟁의 원인과 결과, 평화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를 성찰하기 위해 기획됐다.

'강화도, 근대를 품다'의 저자인 이 교사는 이날 강좌1 '서양의 첫 침략 병인양요', 강좌2 '미국과 싸우다 신미양요' 등 전·후반부로 나눠 강연을 이어갔다.

이 교사는 “서양의 강화도 침탈은 산업혁명 이후 극도로 생산성이 확대된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국의 생산품 판매처와 값싼 원료 공급처를 확보하기 위해 저질러졌다”고 서두를 뗐다.

그는 “서양과의 전쟁이 모두 강화도에서 일어난 것은 이 지역이 당시 수도인 한양의 관문이었기 때문”이라며 “프랑스와 미국은 강화도를 점령한 기간 동안 살인과 방화, 약탈 등의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 강화출신 역사학자 이경수 씨가 ‘서양의 첫 침략 병인양요’와 ‘미국과 싸운 신미양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강화출신 역사학자 이경수 씨가 ‘서양의 첫 침략 병인양요’와 ‘미국과 싸운 신미양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병인양요

병인양요는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위협을 받던 자국 선교사의 보호와 조선의 통상개방 요구를 앞세운 프랑스군에 의해 일어났다.

당시 조선은 서양 열강들의 통상개방 압력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령이 내려지면서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살아남은 선교사 1명이 청나라 톈진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로즈제독은 전함 7척과 병력 1200여 명을 이끌고 강화성을 점령했다.

로즈 제독은 “숨진 프랑스 선교사 1명 당 조선인 1천 명씩, 모두 9천명을 죽이겠다”고 조선정부를 협박하며 살인과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

조선 정부는 정족산성 수성장이던 양헌수 장군에게 포수 500여 명을 보내 프랑스군에 맞서도록 했다.

프랑스군은 병력 120명을 동원해 정족산성을 공격했지만 매복전을 펼친 양헌수 장군의 기지로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고 말았다.

한 달여간 강화도를 점령하던 프랑스군은 조선군이 저항을 계속하자 강화도내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외규장각 도서 300여권을 탈취해 그해 11월 청나라로 철수했다.

양헌수 장군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로로 이후 황해도 병마절도사와 어영대장, 공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을 결사반대했다.

현재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 경내에는 양헌수 장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각이 세워져 있다.

당시 탈취 당했던 외규장각 도서들은 지금까지도 반환을 받지 못했으며, 한시 대여 형식으로 2011년 국내에 들여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중이다.

미군이 광성보에서 학살한 조선군 병사의 시신/사진제공=생명평화포럼
미군이 광성보에서 학살한 조선군 병사의 시신/사진제공=생명평화포럼

신미양요

병인양요가 발생한지 5년 만인 1871년 6월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해군 군함 5척과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공했다.

이들은 평양 대동강에서 불탄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손해배상과 조선과의 통상 요구를 내걸고 침략을 감행했다.

이 사건은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미국 국적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이 평양군민들에게 강압적인 태도로 통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급기야 선원들이 양민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이에 분노한 평양군민들이 배에 불을 지르고 선원들을 살해했다.

5년 전에 발생한 이 사건을 빌미로 로저스 함대가 6월 2일 강화해협을 측량하며 손돌목에 무단 접근하자 강화포대에 주둔 중이던 조선군이 대포를 발사하며 북상을 저지했다.

이 때 한발 물러섰던 미군은 6월 10일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해 백병전으로 대항하던 조선군을 제압했다.

이어 다음날 덕진진을 무혈 점거한 뒤, 광성보로 진격해 이곳을 수비하던 진무중군 어재연 장군 병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월등한 화력으로 무장한 미군은 빈약한 무기로 저항하던 조선군 200여 명을 마구잡이로 살해했고, 끝까지 버티던 조선군 100여 명은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자결하거나 바다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미군 병사의 기록을 보면 “적군은 참패의 와중에서도 단 한명의 탈영병도 없이 결사 항전 중이다. 칼과 창이 부러진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려 저항한다. 이토록 처참하고, 무섭도록 구슬픈 전투는 처음이다”라고 적었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도, 조선이 척화비를 세우고 야간 기습전을 벌이는 등 항전을 멈추지 않자 어재연 장군기(帥자기) 등을 탈취해 퇴각하고 말았다.

어재연 장군기는 이후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2007년 장기임대 형태로 반환되어 강화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광성보 경내에는 당시 전투에서 순국한 어재연 장군과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등이 건립돼있다.

미국은 이 사건을 '1871년 미-한 전쟁(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당시 미국 언론은 조선 원정(Korean Expedition)이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조선은 서양 열강과 벌인 두 전투 모두를 승리로 장식했지만,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 일본을 상대로 운요호 사건을 거쳐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 맺으면서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 교사는 강연을 마치면서 “앞으로 평화 강연을 통해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려면 양국이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열등감을 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우리나라는 과거 식민지 시절을 통해 쌓인 열등감에서, 일본은 이순신 장군에게 패배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설명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대한 강연이 끝난 뒤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대한 강연이 끝난 뒤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인천의 전쟁과 평화로 가는 길’, 오는 11월 20일까지 6개월간 계속돼

이날 첫 번째 강연회를 가진 생명평화포럼의 '인천의 전쟁과 평화로 가는 길' 강좌는 오는 11월 20일까지 6개월 간 5차례의 강연과 2차례의 현장 답사로 이어질 예정이다.

다음달 17일 개최되는 두 번째 강연 '청일·러일 전쟁', 7월 15일 운요호 사건·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 9월 16일 한국전쟁과 인천, 10월 21일 전쟁의 상처와 기억·평화도시 인천의 미래 등 근·현대사를 관통한 전쟁과 인천의 관계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 이경수 교사는?

강화도에서 태어난 이 교사는 경기도 김포 양곡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지내면서 자신의 고향인 강화 역사 연구에 매진해왔다.'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차지 못했는가(푸른역사)', '숙종, 강화를 품다(역사공간)', '강화도, 근대를 품다(민속원)', '강화도史(역사공간)'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글·사진 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