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2일 신미양요 15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 달도 남지 않은 이 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뼈 아픈 역사를 되새겨 교훈으로 삼겠다'는 의지이다. 미국에 뺏긴 어재연 수자기를 되찾아와야 하는 후손의 도리를 잊지 않겠다는 각오도 담겨 있다. 그리고 5000년 역사 중 최악의 한 페이지와 같은 대한민국 근·현대사 속 러·일전쟁을 기억할 바리야크함 깃발과 경술국치로 뺏긴 나라와 해방으로 되찾은 조국의 상징과 같은 광제호 태극기 역시 인천은 기억해야 한다.
무지의 수모 '어재연 장군 수자기', 열강의 야욕 '바리야크함 깃발' 그리고 광복의 혼 '광제호 태극기.' 대한민국 근·현대사 200년. 인천은 유린당한 조국의 상처를 온몸으로 겪었다. 뜯긴 개항과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까지, 인천의 민초는 그런 세월을 견뎌 냈다. 인고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세 깃발.
▶관련기사 : [인천이 기억할 근대사 속 3개의 깃발] 토마스 듀버네이 영남대 교수 “불법 침입해 뺏은 수자기 전리품으로 볼 수 없어”
▶관련기사 : [인천이 기억할 근대사 속 3개의 깃발] '포로 신세' 어재연 장군기, 강화로 잠시 귀환
▶관련기사 : [인천이 기억할 근대사 속 3개의 깃발] 대한제국 광제호의 태극기 인천개항박물관서 관람객 맞아
▶관련기사 : [인천이 기억할 근대사 속 3개의 깃발] 러일전쟁의 상흔, 바리야크함 깃발에 남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무지하고 무능해 300명의 아까운 목숨이 포화 속에 생명을 잃었다. 나라의 상징과 같은 수자기를 뺏겼어도 전혀 반성하지 못했다. 신미양요(1871년)는 국제정세에 까막눈이었던 조선을 여실히 보였고 이후 빗장을 꽁꽁 닫으며 멸망을 자초했다.
1904년, 인천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조선 산하를 짓이겨 놓은 청·일전쟁(1894년)에 패한 뒤 꽁무니를 뺀 청나라의 빈자리에 러시아가 한반도를 노렸고, 인천 앞바다는 죽음의 전쟁터로 전락했다. 제물포 해전으로 일제는 조선 침략 야욕을 완수했고, 러시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전투 때 자폭한 바리야크함 깃발을 노획한 일제, 그 깃발은 해방 후 인천시립박물관이 보관했다.
그리고 1904년부터 광제호에 내걸려 조선의 독립국임을 드높였지만,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 당시 광제호에 탑승했던 신순성 2등 항해사는 광제호 태극기를 침실 깊숙히 숨겼다. 해방될 때까지 고이 감춰진 광제호 태극기, 신순성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 눈을 감았다. 이 태극기는 인천 최초의 의학박사인 신순성의 아들 신태범 박사 손에 맡겨져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 하늘에서 다시금 휘날릴 수 있었다.
세 깃발의 사연은 현재를 살아가는 300만 인천인이 뼛속 깊이 간직해야 할 역사적 교훈을 담고 있다. 그러나 어재연 수자기는 미국이 소유하고 있어, 우린 2년마다 빌려서 전시하고 있다. 러시아 국력과 한반도 운명에 따라 바리야크함 깃발의 사정도 매번 바뀐다. 나라 잃은 설움과 독립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광제호 태극기는 인천의 정신이다.
인천은 세 깃발 앞에 떳떳할까.
최근까지 수자기에 관심이 없던 인천시는 시민 반발 여론에 뒤늦게 다음달 12일 '19세기 국제 정세와 신미양요'란 제목의 학술대회를 계획 중이고, 십여 년 전까지 인천 내부에서는 “바리야크함 깃발을 러시아와 교류를 위해 영구임대해줘야 한다"는 정책을 세웠다.
인천의 한 향토 사학자는 “인천의 뼈아픈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세 깃발을 두고두고 후손에게 물려 줘 다시는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상황을 당하지 않게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고 일갈했다.
/이주영·김원진·이창욱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