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한 장면이 스치듯 지나간다. 여성노동자들은 아침마다 부서 직원들의 입맛에 맞게 종이컵에 수십 잔 커피를 타는 달인임을 보여준다. 8년차 고졸사원들은 뛰어난 능력 소유자지만 창조적인 업무에서 발휘할 수 없다. 보조업무와 재떨이를 비우고 구두를 닦아 오고 담배 심부름하는 것이 일상이다. 임신하면 퇴직이 당연한 조건에서 새벽 영어토익반에 들어간 이유는 최대 목표인 대리 승진을 위해서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담긴 1995년 차별받는 여성노동자들 모습이다.

영화 주인공 자영, 유나, 보람이 그랬듯이 26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직장 내에서 성역할을 강요받는 성차별적 문화는 많은 여성노동자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는 문제다. “여자라서 군대에 가지 않았으니 남자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냐? 동의하냐?”라는 면접관 질문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채용 과정에서부터 차별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페미니즘에 대한 사상검증까지 이어지고 있다. 직장 내 성차별의 시작이며 왜곡된 성역할의 출발점이다.

직장 내에는 고착된 성역할 조직문화가 있다. 여성들에게만 무임으로 요구되는 일들이다. '항상 예쁘고 나긋나긋하게 말을 하고 분위기를 띄우라고 한다', '여자가 사오는 것이 더 맛있다며 음료수 심부름을 시킨다', '손님이 왔을 때나 행사가 있을 때 준비 및 안내는 항상 젊은 여성이 맡는다', '상사가 전날 과음하면 속풀이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맡은 업무뿐만 아니라 여성노동자의 존재 가치 중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업무가 추가되고 구체적인 언동 방식을 요구받기도 한다. 당연히 상사의 심기를 살펴야 하고 심지어는 사적 용무까지 떠맡는 일을 하기도 한다. 외모나 사생활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업무와 상관없는 불편한 질문들도 받는다. 이로 인해 업무가 아닌 것에도 신경을 써가며 일을 해야만 한다. 여성노동자는 감정노동, 꾸밈노동 등 그림자 노동에 이어 이제는 심기노동, 감정수발 노동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성차별적 조직문화는 조직운영까지 이어져 성차별적인 업무분장과 배제된 노동환경에서 여성노동자들은 눈치 보며 스트레스 받는 등 일상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이 대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성차별적인 조직문화는 젠더(생물학적 성이 아닌 사회적 의미의 성) 괴롭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했던 직장 내 성희롱, 권력형 성희롱이 이런 조직문화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차별 행위의 일종임을 다시 한번 되새겨봐야 한다.

음료수는 누가 사와도 똑같은 맛이라는 것, 회의 끝난 사무실에 놓고 나온 컵은 누군가가 치워야 한다는 것, 관심과 칭찬이 마냥 즐겁지만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전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왜 유별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모르겠다며 반대로 불편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성차별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고 있는 반면 견고한 성차별적 조직문화 벽은 여성노동자를 위협하고 심지어는 고용상의 불이익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평등하고 건강한 조직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 작은 실천부터 가능하다. 서로 존중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 사용한 컵은 내가 치우는 것, 개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사생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는 것, 당연히 알고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것부터 시작이 변화의 시발점이 된다.

또한 조직문화에서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고, 조직 내에서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지는 소통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여성노동자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성평등 조직문화를 안착시키고 사회 전반에 성평등 문화를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평등한 조직문화는 구성원 모두가 존중받는 문화가 정착되고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모두를 지켜내는 것이다.

/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