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주재런가 맑고 고운 산/그리운 만이천 봉 말은 없어도/이제야 자유 만민 옷깃 여미며/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1절)/비로봉 그 봉우리 예대로 있나/흰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발 아래 산해만리 보이지 마라/우리 다 맺힌 슬픔 풀릴 때까지(2절)/(후렴)수수만년 아름다운 산/못 가본 지 그 몇 해/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금강산은 부른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야외광장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우뚝 서 있다. 새얼문화재단이 2000년 8월15일 높이 6m, 폭 6.4m, 무게 60t의 오석(烏石)을 소재로 건립해 인천시에 기증했다. 인천 강화 출신 고(故) 한상억 시인의 시에 역시 강화 태생 작곡가 최영섭(93) 선생이 곡을 붙여 1962년에 발표한 노래다. 한국인이 아주 애창하는 곡으로 꼽힌다.

이 곡의 탄생 계기를 한번 보자. KBS(당시 중앙방송)는 '이 주일의 코너'에서 매주 창작곡을 선보였는데, 1961년 한국전쟁 11주년을 맞아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주제로 한 곡을 이들에게 의뢰했다. '그리운 금강산'은 그 무렵 실향민과 중국·소련 등지 동포에게 감동을 주는 노래라는 평을 들었다. 금강산 절경을 그리는 한편, 분단으로 인해 가지 못하는 심경을 잘 표현했다.

그러다가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진행되자, 전파를 타면서 국민 가곡으로 읽혔다. 첫 발표 이후 해외동포나 실향민들에게 널리 불리면서 유명해졌다. 그 해 남북화해 분위기가 한창일 때는 '통일 주제가'란 명칭을 얻기도 했다. 사연은 또 있다. 일부 가사 내용이 바뀐 것이다. '더립힌 지 그 몇 해'를 '못 가본 지 그 몇 해'로, '우리 다 맺힌 원한'을 '우리 다 맺힌 슬픔'으로, '더럽힌 자리'를 '예대로 있나'로 개사했다. 북한 정권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드러내고 있어 민족 화합을 조성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때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금강산 여행을 시작하면서 이 노래는 더 유명세를 떨쳤다.

그런데 '그리운 금강산'을 만든 최영섭 작곡가의 자필 악보(1500여권) 관리 방안을 세워야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특히 작곡가가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하루빨리 그의 업적을 기릴 사업을 벌여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그는 '그리운 금강산'뿐만 아니라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본인 작곡 19편과 드보르작·모차르트 등의 음악을 편곡한 1100여편을 오선지에 수기(手記)한 내용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는 인천시에 이 자료들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소중한 '문화자료'가 아닐 수 없다. 시민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본다. 일반 시민과 문화예술가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안성맞춤이다. 앞서 인천시는 인천 출신 작곡가 겸 가요연구가 김점도씨의 가요책자 2000여권과 유성기판 2300여장, 레코드판 2만여장 등 높은 가치의 자료를 다른 곳으로 보내는 우를 범해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인천이 낳은 훌륭한 음악가를 홀대하는 시행착오를 다시 겪지 말았으면 한다.

/이문일 논설위원